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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론자

얼마전에 읽었던 『헌법의 풍경』에서 저자인 김두식은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던 때에 한 교수의 수업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시험보는 기계를 양산하는 것과 다르게 실제 토론수업을 하고, 학생에게 윤리적,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수업 시간중에 지목된 학생은 주장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에 반박을 할 뿐이다. 마치 교수의 주장은 없고, 지목당한 학생의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해나가는 뿐인 듯 하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헤겔이 집대성한 변증법 즉 정과 반을 통해 합이라는 진보를 향한 도달과는 다르다. 변증술은 합을 향하여 나간다기보다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正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절대론적 윤리설이라고도 하는데,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윤리 규준을 인정한다.

 

절대론적 윤리설은 무너진지 오래지는 것은 물론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미국의 로스쿨 수업 풍경을 보면,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운다. 학생은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가며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절대적인 옳음이 있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며, 그리고 하나의 사건에 개입하는 수 많은 관점과 관점을 유발하는 가치관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하나의 관점으로 사건을 보기보다는 학생보다 더 많은 상식을 가지고서 논박하는 교수의 태도 덕택이다.

 

궤변이란 논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말을 포장하는 것이다. 논리학에는 타당성과 건전성이 있는데, 타당성은 논리의 형식을 다루며 건전성은 논리의 내용적 적합성을 따진다. 궤변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있고, 건전하지 못한 이유는 내용의 측면에서 상식, 직관, 전문가, 경험 에 의하여 논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성적인 금기가 있고, 직관적으로 1+1=2 라는 정답이 있으며,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있는 것 같다. 더불어 경험적으로 아마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다. 논증하는 4가지 요소는 분명 현재에는 옳다고 인정되는 바이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시대에는 남색男色이 상식이었고, 어린시절에는 1+1= 창문 이 정답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전회가 있기 전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전문가의 주장이었으며 나침반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해가 뜨는 곳이 동쪽이지, 동쪽에서 해가 뜨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리적 건전성을 담지하는 4가지 요소는 경험주의의 귀납추리의 결과이다. 어느 논리적인 철학자도 절대적인 제1공리를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존재의 독립성과 인식의 출발점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다. (사견으로는 스피노자는 그래서 대단하기는 하다. 다 만든 느낌이라서-_-) 절대적인 상식, 직관, 경험, 전문가 에 의한 논증은 불가능하다.

 

궤변이란 건전하지 못한 주장이며, 논증이다. 하지만 위의 로스쿨 풍경에서 보았듯이 교수의 말은 전문가의 권위에 의하여 증명이 가능한 논거를 달기 때문에 적합성이 높은(그럴듯 해 보이는) 주장일 뿐이다. 사실인즉 궤변론자는 교수이고, 교수는 학생을 논리적으로 탄탄한 타당성을 갖춘 애기궤변론자로 만들고 있다.

 

"악법도 법인가?"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있으니 악법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하며, 근대 이후에 말하는 전쟁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계약론의 소산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법이니까 지켜야한다는 상식을 제공한다. 이 문단은 이상한데 그럼 악법은 나쁜 것인데 선을 위해서 악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라는 조건이 두개 달린다. 이건 궤변인가??-_-

 

소피스트들을 보고서는 궤변론자라고 하며,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또 다른 궤변을 강권하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틀을 갖추는 것이다. 곧 논리적으로 타당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소피스트적인 사고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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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라고 제목을 단 마이클의 책이 나온 이후로 다시 한 번 정의는 정의롭지 않게 되었다.

고마가 일하는 미지북스에서 센델비판서적이 나오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정의라는 말은 매혹적이면서도 쉽사리 잡을 수 없는 장미와 같다.

누구라도 장미와 함께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매력적이게 되지만,

매력에 끌려 서투르게 쥔 한 손에는 핏방울이 흐르게 마련이다.

 

마이클이 적은 책의 마이클의 한 마디를 읽고 정의를 움켜쥐는 것은

장미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요크가家와 랭커스터가家의 혈투 마냥 

하나의 빛깔이 담긴 장미를 움켜쥐고 다른 색깔을 까대며 나와 너의 피를 흘리는 것과 뭐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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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공장, 이언 뱅크스.

평소에는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쉽사리 남기지 못한다. 생각의 꼬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고, 그만큼이나 질기고 긴 생각의 꼬리를 싹뚝 잘라내고서 무언가를 적어 남기는 것은 마치 '나'의 사고의 지평을 한정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이언 뱅크스의 『말벌공장』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한가지 무늬의 인상을 각인시켰다. 소설이 끊이지 않는 묘사와 서사 그리고 상징으로 독자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말벌공장에서 이언 뱅크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다. 사회적인 성性과 육체적인 성性, 그인 동시에 그녀인 주인공 프랭크는 무엇일까.

 

        - 이하는 스포일러가 강하고 개인적인 관점이 강하게 개입되어있기에, 책을 읽기전에는 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ㅋㅋㅋ

 

책의 말미에 이르러 문득 서양에 있었던 한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아쉽지만 사건의 전말만을 기억 할 뿐, 행위자의 이름이나 발생했던 장소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사건은 부모가 자식을 낳고 키우는데 남자아이에게 여자아이를 여자아이에게 남자아이가 되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아이가 남자아이였는지 여자아이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결과 아이는 성장하며 자신의 본래 sex와는 다르게 여겼고, 그러한 상태로 성장했다. 부모가 아이의 sex[각주:1]를 부정할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서양의 거대담론 중의 하나인 gender[각주:2]에 대한 믿음에 있다.

 

성역할이 사회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겼던 부모는 아이의 gender를 sex와 분리하였고, 사회화의 과정에 직접 개입한다. 아마뱅크스는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gender에 일침을 놓는다.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가부장제가 여성의 생물학적 출산능력을 통제하였다는 것인데, 따라서 생물학적인 성인 sex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말벌공장의 아빠는 gender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자녀의 성역할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당시 gender에 대한 논의가 만든 하나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재의 gender연구는 '사적 영역의 민주화'라는 기든스의 주장과 같이 사적 영역에서 스스로가 주권을 갖는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기치를 여성해방과 동일선상에 둔다.)

 

프랭크는 마지막에 남근선망과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사건의 원인을 sex를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그 시작점은 늘 여성의 임신가능성에 의한 모성애와 현실적인 측면이다. 뱅크스는 대담하게도 이러한 면을 여성성의 실체라 인정한다. 육체에 따른 본성을 부정당한 프랭크가 저지른 세건의 살인행위에서 더 나아가, 현재까지 남성으로서 살아온 자신을 죽이고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네번째 살인행위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일까? 는 생각할 거리로 남는다.

 

프랭크, 그가 아빠에게서 진실을 들을 때까지, 자신의 sex가 여성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하고 아빠의 바지를 벗기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상징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일은 패턴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 패텬에 대해 적어도 약간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강자는 자기 자신의 패턴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패턴에 영향을 끼치고, 약자에게는 이미 정해진 진로가 주어진다. 약하고, 운이 나쁘고, 어리석은 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p.179


내가 진화의 개념을 이해하고 역사와 농업에 관해 조금 배운 후에는, 내가 비웃던 멍청하고 흰 이 동물, 서로를 좆좆 따라다니고 덤불에 걸려 허우적대는 양들은, 수도 없이 많은 동물 세대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수백 수천 세대에 걸쳐 그것들을 키운 농부들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p.223


당시 에릭을 붕괴시켰던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하나의 약점이었고, 진짜 남자라면 결코 가지고 있을 기 없는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p.225

 

 


 


  1. 육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가르는 남과 여. (성기의 유무) [본문으로]
  2. 사회적으로 학습된 성性이며 여성주의가 나누는 중심담론이다. 푸코에 따르면 언제나 인간의 삶을 교차하고 있는 다양한 권력들 사이에 역사적으로자리잡아왔다. (성의 역사, 미셀푸코) 본문에서는 성역할을 나누는 것이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남과 여 사이에는 육체적 구분을 지양해야 한다는 급진적여성주의의 주장에서 나왔다. 진화론이 발전하면서 남과 여가 평등한 성향을 갖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일고 있지만, 그조차도 남근선망의 발현이라는 착각에 의한 생각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나는 모르겟다-_-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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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글쓰기.

한 글쓰기 수업에서 감당하지 못 할 비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다시금 글을 쓴다. 이렇게 표현했다. "비유에게 미안했다." "칼날이 나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 비유와 은유로 잔혹한 현실을 비껴볼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든다. 정말 비유가 문제였을까, 사실 비유는 문제가 아니였을런지도 모른다. 비유와 은유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비스무리한 시각과 시야, 그리고 시력을 바탕으로 힘을 갖게 마련이다.

 

그는 서둘렀다. 문장은 문장을 휘갈겼던 그를 앞서 나아갔고, 쓰여진 문장의 겉모습은 글 안에서 균형잡힌 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기보다 그의 습관을 드러냈다. 각 문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문자의 사용이었을 뿐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정합성보다 적당한 수준의 모순으로 스스로의 세계를 드러냈다. (모순과 정합성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가치판단은 배제한다.)

 

'내가 그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나를 그에게로 투영하는,'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역시나 비유와 은유를 이해시키고, 이해하는데에 가장 기초적으로 자리한다. 결국 비유와 은유는 글 안에 포섭되어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하며, 역량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아쉽게도 글은 단독적이며 개별적으로 완벽한 대상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 '우리'는 언어의 수인."이라고 말했듯이 글쓴이가 언어와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단독적이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디든 존재하고, 어디서든 독자와 글 사이에서 단 둘만의 결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쓴이가 의도하는 바가 설령 있었더라도 그렇게 읽힐 것인가는 기대 할 수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만큼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던가? 애를 놓은 기분이라고, 이제는 커가는 과정을 볼 뿐이라고. 결국 글쓴이는 스스로의 글을 지배할 수 없다.

 

그는 글을 세상에 내놓았고, 타자에게 읽혔다. 그의 육성이 자신의 글에 가감하는 해석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대를 벗어난 바람소리는 청자들의 귓가를 울렸고, 글과 독자가 갖는 둘만의 시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비유와 은유를 이해하기에는 공감의 능력이 결여되는 시간, 스스로의 내적정화를 위해 애쓰는 짧은 글쓰기는 공감이 없는 해석 속에서 난도질 당했다.

 

최소한의 공감에 대한 노력이 있었더라면 글쓴이였던 그에게 가학적인 문장을 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던진 순간 들려오고, 소화하는 순간 기억이 된다. 편린으로 남은 기억조차도 끊임없이 희구되며, 새로워진 기억이 생각과 행위를 더 나아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적은 글은 타자에 대한 인터뷰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국에 이르러서는 거울 속 인터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인터뷰가 되었다.

 

나의 글쓰기는 남에게 어떻게 읽힐까, 그가 와서 읽어 볼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이렇게 한번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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