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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나무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려서 '무엇이든 주는 나무'라는 짤막한 동화를 읽었다. 동화책이라 했지만 실은 그림책이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었지만 노란색이었고, 줄기는 갈색이었지만 동시에 붉은색이었다. 나무가 너무 예뻤고, 그래서 나무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당시 그 나무를 좋아했던 것은 확실한데 그 이야기를 좋아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니 나무 삽화를 좋아했던 게 아니고 실은 그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기억이야 늘 변하니까 뭐. 나무는 아이와 함께 커나갔다. 나무는 아이에게 늘 물었고, 아이에게 늘 베풀었다. 나무는 늘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야 무슨 일 있니? 그럼 아이는 득달같이 말을 이어가는데 어느 날에는 배가 고프다며, 여름 날에는 너무 덥다며, 여느 날에는 그네가 타고 싶다며 귀엽게 .. 더보기
9월자 글쓰기 - 젠더. 친하고 싶어서 보여주려 하는데, 너는 나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끄고서는 손을 들어 오징어잡이 배를 가리켰다. "난 이 세상에 있는 오징어의 수만큼 너를 사랑해." 그이는 이 세상에 있는 오징어의 수만큼 나를 사랑한더랬다. 그이는 동해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오징어잡이 배가 저만치 보이기도 했고, 그이는 어려서 오징어잡이 배에 올랐다고 했다. “다른 단어는 필요치 않아”(라고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둠 속에서 그이의 몸을 더듬어 손을 찾았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 물었다. "차라리 모래알이라고 하지?" "그건 너무 식상하잖아." 그이는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힘을 주어 대답했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멀리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한 곳에 .. 더보기
20120911 나방. 8시 53분에 학교에 도착했다. 담배를 한개피 꺼냈고, 라이터를 들었다. 그리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반절쯤 피웠을까, 목덜미 뒤로 괴이한 이질감이 엄습했다. 내 눈구멍이 앞으로 쏠려 있어서인지 깜짝 놀랐고, 마치 곤충의 신경반응처럼 허리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움찔, '하나'가 시야에 잡혔다. 나방이다. 나방이 창에 여러번 몸을 부딪혔다. 창을 넘어들려나보다. 그런데 한마리다. 종종 밤거리에서 봤다. 골목의 전등불 아래로 나는 나방, 끊이지 않고 배회하기를 여러번, 그렇게 보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나방들이 자리잡고 있는 가로등을 지나쳐 있다. 득실득실하다. 꿈틀꿈틀은 아니다. 애벌레들처럼 포개져 있지도 않다. 서로 가까이 다가가면 정전기 전깃불이 튀어 그 작은 몸이 불타버릴게 .. 더보기
8월자 글쓰기 - 섹스. 1998.04.25, 1998.05.25, 1998.06.25....... 2002.05.25, 2002.06.25, 2002.07.25, 2002.08.25....... 2004.10.25. IMF로부터 79개월, 매달 200만원 그리고 저금 통장에 찍힌 79개의 '송금'이란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두번, 세번, 네번째로 "1998.04.25 2000000 송금"가 새겨진 통장의 첫 페이지를 펴려 손가락을 움직이던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6년 전 "하늘이 무너진다"라는 말의 의미가 와 닿았던 그 날에도 손에는 12인승 버스의 열쇠와 이 통장뿐이었다. 비를 뿌릴 것 같던 하늘은 한 두방울 물방울을 흘렸고, 빗물은 통장에 자국을 남겼다. 검정색 글자는 점차 감청색 흔적으로 변해갔다. '6'이.. 더보기
다른 빛깔, 다른 색깔. 마지막 학기가 시작점을 찍었다. 나는 2005년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올해는 2012년이고, 어느새 8년을 채워가고 있다. 이 학교가 애들을 못 괴롭혀서 불만인지 늘상 왜이렇게 개강을 빨리하냐며 ㅆㅃㅅㄱ대 라고 욕했지만, 설마 개학공포증에 걸린 고테츠와 같은 마음일쏘냐. 고테츠처럼 노는 데에 열정이 넘치지 않는 나로서는 반갑기까지 하다. 개강은 즉 종강이니, 그 지나가는 시간의 무게를 벅차다고 여겨기기도 했지만 이제껏 나를 거쳐간 시간이 가져다 준 배움을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의 무게는 기름기가 쪽 빠져 다이어트 당해버리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말 누가 했는지 거참) 이미 대학교에서 9번째 개강 첫째날이지만 이렇게 또 왔고, 또 다시 색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처음이라는 말이 주는 설렘은 긴장..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