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3 신념부재.

걸 개 2012.11.13 18:26

글쓰기를 많이 하고 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적어내려가다 보면 무언가 걸리적 거리는 껀덕지가 있다. '직관'이라는 경험을 통한 표상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달아 본다. 한 예술가는 감각자료가 축적되어 있는 중에 특정 경험을 하면 표상이 맺힌다고 했다.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난다, 미학자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아침에 읽은 책 혹은 드라마 영화의 이미지가 어떤 사람과 저녁 식사를 할 때 떠올라 결합하여 모호한 인상을 갖게 된다면, 이는 일종의 표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지만 불명확한 껀덕지에 걸리적 거리는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적는 족족 제출을 하는데 곧 평가로 이어진다. 흔히 이러한 평이 나온다. "글을 장악하지 못함, 저자의 미끄러짐, 불분명하고 논리적 건전성이 떨어지는 표현." 이러한 평을 받는 까닭은 분명히 내가 나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일련의 표상의 범람에 있다. 사고는 단어로 범주화되고 위계화되어야 나를 빠져나올 수 있다. 표상은 단어를 통해 나를 빠져나와 상대에게 나아가 닿았을 때 의미를 갖는데, 표상 간의 논리성은 내적으로만 정합적이기 일쑤다. (내적 정합성조차도 갖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지만 이것은 뺌.ㅋ) 그럼 변환을 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자료의 양을 세계의 사실과 동등한 수준에 맞추어 정합성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 부분은 늘 어렵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는 표상은 나아가 닿지 않으며, 내 머리 안에서 다른 감각자료와 짬뽕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표상을 일으킨 시발점조차도 잊는다.

 

우선 개인적인 논리를 세계에의 논리에 맞추고, 적합한 단어를 발견하는 것이 우선인데, 그러려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현재의 나는 "책을 읽어서 글솜씨가 늘어난다고 내게 어떤 도움이 생길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 우선은 그냥 하는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Posted by namit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두자.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 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마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샤르트르, 말, 마지막.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라고 적혀있었다. 몇번을 따라 읽었다. 

샤르트르 역시 철학의 이론으로 무신론적 실존이니, 즉자니 대자니,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니 말하며 세상에 대해 설명을 하려했지만 한때 펄떡였던 죽은 생선같을 뿐이다. 살아서 펄떡이는 활어처럼 문학의 구절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안토니오 타부키는 "철학은 오직 진리에 관계된 것 같아 보이지만 환상을 말하고, 문학은 오직 환상에 관계된 것 같아보이지만 진리를 말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되새기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학문은 자신의 일방적인 어법으로 세상을 설명하려하지만, 예술은 자신의 어법을 통해 세상에 나서려는 것이라고

 

 

Posted by namit

궤변론자 수정1

걸 개 2012.05.14 19:22

얼마전에 읽었던 『헌법의 풍경』에서 저자인 김두식은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던 때에 한 교수의 수업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시험보는 기계를 양산하는 것과 다르게 실제 토론수업을 하고, 학생에게 윤리적,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수업 시간중에 지목된 학생은 주장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에 반박을 할 뿐이다. 마치 교수의 주장은 없고, 지목당한 학생의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해나가는 뿐인 듯 하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헤겔이 집대성한 변증법 즉 정과 반을 통해 합이라는 진보를 향한 도달과는 다르다. 변증술은 합을 향하여 나간다기보다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正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절대론적 윤리설이라고도 하는데,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윤리 규준을 인정한다.

 

절대론적 윤리설은 무너진지 오래지는 것은 물론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미국의 로스쿨 수업 풍경을 보면,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운다. 학생은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가며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절대적인 옳음이 있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며, 그리고 하나의 사건에 개입하는 수 많은 관점과 관점을 유발하는 가치관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하나의 관점으로 사건을 보기보다는 학생보다 더 많은 상식을 가지고서 논박하는 교수의 태도 덕택이다.

 

궤변이란 논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말을 포장하는 것이다. 논리학에는 타당성과 건전성이 있는데, 타당성은 논리의 형식을 다루며 건전성은 논리의 내용적 적합성을 따진다. 궤변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있고, 건전하지 못한 이유는 내용의 측면에서 상식, 직관, 전문가, 경험 에 의하여 논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성적인 금기가 있고, 직관적으로 1+1=2 라는 정답이 있으며,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있는 것 같다. 더불어 경험적으로 아마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다. 논증하는 4가지 요소는 분명 현재에는 옳다고 인정되는 바이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시대에는 남색男色이 상식이었고, 어린시절에는 1+1= 창문 이 정답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전회가 있기 전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전문가의 주장이었으며 나침반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해가 뜨는 곳이 동쪽이지, 동쪽에서 해가 뜨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리적 건전성을 담지하는 4가지 요소는 경험주의의 귀납추리의 결과이다. 어느 논리적인 철학자도 절대적인 제1공리를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존재의 독립성과 인식의 출발점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다. (사견으로는 스피노자는 그래서 대단하기는 하다. 다 만든 느낌이라서-_-) 절대적인 상식, 직관, 경험, 전문가 에 의한 논증은 불가능하다.

 

궤변이란 건전하지 못한 주장이며, 논증이다. 하지만 위의 로스쿨 풍경에서 보았듯이 교수의 말은 전문가의 권위에 의하여 증명이 가능한 논거를 달기 때문에 적합성이 높은(그럴듯 해 보이는) 주장일 뿐이다. 사실인즉 궤변론자는 교수이고, 교수는 학생을 논리적으로 탄탄한 타당성을 갖춘 애기궤변론자로 만들고 있다.

 

"악법도 법인가?"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있으니 악법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일반적인 법치에 대한 착각은 법치를 법규로 보게 만들고 법규[각주:1]에 의한 사회를 정당화한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하며 대중에게 법규사회를 가르친다. 근대의 성과물인 홉스식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계약의 소산으로써 시민사회에 다다르게 되었고 사회가 만든 법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냥 법이니까 지키는 것이 상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문단은 이상한데 그럼 악법은 나쁜 것인데 선을 위해서 악법을 지켜야 한다와, 부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기에 법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숨겨진 전제가 두개 달린다. 국가가 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건 좋게 봐줘서 그런 것이지, 실제로 그런가? 그럼 이는 건전하지 못한 주장, 궤변인가??-_- (내가 적었지만 그냥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말인 것 같기고 하고, )

 

소피스트들을 보고서는 궤변론자라고 하며,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전해지는 "악법도 법이다."[각주:2]라는 또 다른 궤변을 강권하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틀을 갖추는 것이다. 곧 논리적으로 타당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소피스트적인 사고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고 있다.

 

  1. 법치와 법규는 엄연히 다른 의미인데, 스피노자가 한 말을 빌려 설명해 본다. "모든 것을 법률로 통제하려는 자는 악을 질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신장시킬 것이다." 법규란 법률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것이고, 법치란 법이 스스로 갖는 권위를 시민이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실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한다. 법규사회를 이끈 박정희식 윤리교육의 병폐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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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글쓰기.

걸 개 2012.05.02 11:49

한 글쓰기 수업에서 감당하지 못 할 비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다시금 글을 쓴다. 이렇게 표현했다. "비유에게 미안했다." "칼날이 나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 비유와 은유로 잔혹한 현실을 비껴볼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든다. 정말 비유가 문제였을까, 사실 비유는 문제가 아니였을런지도 모른다. 비유와 은유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비스무리한 시각과 시야, 그리고 시력을 바탕으로 힘을 갖게 마련이다.

 

그는 서둘렀다. 문장은 문장을 휘갈겼던 그를 앞서 나아갔고, 쓰여진 문장의 겉모습은 글 안에서 균형잡힌 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기보다 그의 습관을 드러냈다. 각 문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문자의 사용이었을 뿐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정합성보다 적당한 수준의 모순으로 스스로의 세계를 드러냈다. (모순과 정합성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가치판단은 배제한다.)

 

'내가 그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나를 그에게로 투영하는,'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역시나 비유와 은유를 이해시키고, 이해하는데에 가장 기초적으로 자리한다. 결국 비유와 은유는 글 안에 포섭되어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하며, 역량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아쉽게도 글은 단독적이며 개별적으로 완벽한 대상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 '우리'는 언어의 수인."이라고 말했듯이 글쓴이가 언어와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단독적이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디든 존재하고, 어디서든 독자와 글 사이에서 단 둘만의 결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쓴이가 의도하는 바가 설령 있었더라도 그렇게 읽힐 것인가는 기대 할 수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만큼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던가? 애를 놓은 기분이라고, 이제는 커가는 과정을 볼 뿐이라고. 결국 글쓴이는 스스로의 글을 지배할 수 없다.

 

그는 글을 세상에 내놓았고, 타자에게 읽혔다. 그의 육성이 자신의 글에 가감하는 해석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대를 벗어난 바람소리는 청자들의 귓가를 울렸고, 글과 독자가 갖는 둘만의 시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비유와 은유를 이해하기에는 공감의 능력이 결여되는 시간, 스스로의 내적정화를 위해 애쓰는 짧은 글쓰기는 공감이 없는 해석 속에서 난도질 당했다.

 

최소한의 공감에 대한 노력이 있었더라면 글쓴이였던 그에게 가학적인 문장을 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던진 순간 들려오고, 소화하는 순간 기억이 된다. 편린으로 남은 기억조차도 끊임없이 희구되며, 새로워진 기억이 생각과 행위를 더 나아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적은 글은 타자에 대한 인터뷰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국에 이르러서는 거울 속 인터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인터뷰가 되었다.

 

나의 글쓰기는 남에게 어떻게 읽힐까, 그가 와서 읽어 볼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이렇게 한번 적어본다.

 

Posted by namit

선택.

걸 개 2012.04.16 14:38

 

 

이성은 가능한 선택지를 추측하고 파악하는 능력일 따름이다.[각주:1] 선택은 감성[각주:2]의 역할이다.

호불호를 가늠하게 하는 감성의 역할이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고 행동을 만들어낸다.

경제학이 가진 대전제의 여파일까, 현대에 흔히들 말하는 합리적인 선택은 도구적 이성에 경도되어

실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하나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헤게모니, 관습, 독단으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인간에 목을 매기에 우리 각자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1. 분석하고 규정하는 능력정도라고 가정한다. [본문으로]
  2. 좋아함, 싫어함을 정하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자 [본문으로]
Posted by namit
TAG 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