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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이/계속살기

관심에 대한 짧지만 짧지 않은 고찰.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그렇지만 그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주인공인 요조가 생각하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라는 부분은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아"라는 말이 그 시발점이다. 이 책이 하는 이야기가 종 다양성을 강조하거나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구를 밟고 있는 개인과 어느 누구도 똑같은 인격체일 수 없는 것과 같이 개인의 세상의 개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세상의 수와 일치한다. 이야기를 나누며 타자를 이해하는 듯 싶지만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나무를 바라보면서도 누구는 나무의 잎새를 바라보고, 누군가는 나무를 비추는 햇살을 느낀다. 
 

개인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세상에서 나름의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의 숫자 역시 인류의 숫자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개인의 진리에 의하여 분리되고 측정된다. 모두는 각자의 틀 안에서 사건이나 타인을 바라보며 관심을 갖기도 하고, 무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상대의 관심을 모으려는 욕구는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관심을 받으려는 사실이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존재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부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심을 얻기는 쉽지 않다.

타인의 시선에서 관심을 느끼고 그 관심을 원하는 개인은 유아기 때 부모의 무한정한 사랑을 벗어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리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관심을 받는 것이 쉽지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내 개인의 세상에 있는 잣대로 남을 받아들이거나 내칠 준비를 한다. 하지만 비단 ‘나’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남’도 ‘나’를 받아들이거나 내칠 준비를 하기 때문에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집단에 속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개인의 세상과 집단의 세상은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의 세계가 되고 각자의 잣대가 따로이 존재한다. 집단의 속성은 어떤 관심사로 모였느냐에 따라 그 질을 달리하며 그 관심사를 바탕으로 외부자로써의 개인을 포용한다.

언어적 동물이어서 그럴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야기의 주제는 관심사에 따라 다르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의 시선은 이야기하는 '나'에게 모인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가 보내고 있는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심은 온전한 나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지식의 양과 경험에 집중된다. 이러한 관심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그룹이 공유하는 관심사는 나의 관심사가 된다. 사회화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구조 혹은 환경에 의하여 관심사를 선택당하지만 인간은 이를 주체적으로 형성했다고 착각한다.
 

관계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되게 마련이고, 사회 속의 인간은 그 안에서 사랑을 갈구하고,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각자가 개인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쉽게 타인의 역사나 경험에 관심을 갖기는 쉽지 않다. 즉 온전하게 보존할 수 없는 모습에 유행에 따르듯이 최대한 많은 이갸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더욱 집중한다. 이는 내면을 내보이기 어렵고, 외면에 관심을 갖기가 쉽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은 결국 내면과 외면 모두에 작용한다. 외면에서와 내면 모두 사회일반이 공감하고 요구하는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내면은 마치 사회가 공유하는 관심사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아름다워지고, 외면은 매체나 언론이 주입하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의 상에 집중한다. 급우와 같은 작은 또래집단을 비롯하여 국가라 불리는 거대 조직에까지 조금이라도 더 쉽게 관심사에 끌 수 있는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

거대자본을 가진 기업이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미덕이라 가르치는 현 세태는 Jean Baudrillard가 말한 것과 같이 소비에 극단적인 관심을 같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욕구 앞에서 평등하고, 충족의 원칙 앞에서도 평등하다는 자연주의적 인류학의 명제 하에서 행복은 눈에 보이는 기준들에 의하여 비춰질 필요가 있다. 소비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소비에 대한 미덕 아래에서 권력자인 그들이 제공하는 가치에 집중된다. 그 가치는 비판없이 쉽게 흡수할 수 있는 외면적인 가치가 대부분이다. 이제 외면적인 가치에 더욱 관심을 집중하고 소비와 같은 행위는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하나의 예가 된다.
 

소비를 위하여 돈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소비하는 재화는 엇비슷한 종류이다. 드라마에서 현빈이 입고 나온 옷, 뉴스에 나온 이건희 회장이 타고 다니는 차, 이영애가 선전한 아파트는 대부분의 사람이 집중하는 단 하나의 관심사가 된다. 그리고 소비를 할 수 있는 재산의 양에 따라서 그룹은 나뉜다.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가치인 행복 혹은 사랑에 관심을 갖지만 그리고 그 느낌은 비슷할 수 있지만, 행복과 사랑을 얻기 위한 방법은 재산의 양에 의존한다. 그들이 소비하는 재산의 양에 따라서 각자의 생활범위는 한정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 가진 재산의 양에 부합하는 소비에 관심을 집중한다.
 

재산의 양으로 나뉜 삶의 영역은 그 안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심이 오도록 하는 방법을 정형화한다. 강남의 땅부자 어머니들은 부동산 이야기에 집중하고, 어제 나온 드라마의 주인공이 입고 나온 옷이 얼마인지 이미 알고 있다. 오늘 그들의 대화 주제는 드라마의 스토리로 시작하여, 주인공이 입고 나온 옷과 그들이 밥을 먹은 음식점, 그리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으며 음식점 혹은 백화점으로 이동한다. 반면에 같은 강남임에도 포이동 판자촌의 어머니들을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들의 감정 혹은 스타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후 백화점과 음식점이 아닌 원조품을 들춰보고, 아이들의 신학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작은 시장으로 향한다. 당장의 생존과 판자촌에서 쫓겨났을 때의 두려움에 마을을 지키며 강남의 땅부자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조차 없다. 어찌보면 그들의 무관심에 분개할 뿐이다.
 

나뉜 삶의 영역은 통합되지 않는다. 부자와 빈민은 만날 기회가 없을뿐더러 만났을 때 같은 드라마를 보고서도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을뿐더러 삶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특정 대상을 보는 시각은 상이하다. 그리고 서로를 접하였을 때 그들이 입은 옷은 겉모습을 구분한다. 서로는 편하게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을 택하여 외면에 집중하고, 이미 일치하는 주제가 없음을 인식한다.
 

나누어져 있는 집단과 집단이 접촉하는 경우는 돈 문제 혹은 인간의 내면 혹은 외면에 대하여 집중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진다. 고용주와 노동자가 되는 경우 혹은 외면에 의한 성적인 관심이 아니 경우는 매우 적다. 내면에 대한 관심은 늘 뒷전으로 미루어지기 마련이다.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하여 집중하기 시작한 특정 대상에 대한 개인의 관심은 주체적으로 만들어진 듯 느껴진다. 하지만 실상은 속해 있는 사회구조와 속한 집단의 성격에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갖고 있는 관심사에서 벗어날 필요도 없고, 그 관심을 버릴 필요도 없다. 그 안에서 안주하며 행복하다. 위의 소비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 신자유주의에서는 소비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가 속한 집단에서는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관심사 외의 것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개인의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느낄 수 조차 없다. 개인의 세상은 그가 속해있는 집단 안에서 더욱 편협해진다. 집단의 관심은 자신의 관심과 동일시되고, 소비사회는 재생산되는 인스턴트식의 뉴스와 드라마와 같은 story를 제공한다. 그 안에 안주하기 때문에 새로운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은 사라진다.
 

개인의 세상이 규정하는 관심은 구조에 영향을 받은 집단의 관심과 일치하게 된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도와야 한다는 당위론은 이미 의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며, 그 이상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의무는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개인이 세상을 규정하는 인간의 현실 속에서 온전한 관심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 행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현실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온전한 관심을 보내기 위해서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과거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욱 우선시 하는 현재 상황에서 온전한 관심의 대상은 늘 자기 자신이고, 이는 소비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표현된다. 관심의 대상을 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기애를 채우기 위하여 타자의 관심을 요구하는 것은 집단보다 개인을 중시하기 때문에 긍정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심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에 공동체 속에서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아 전체주의를 예방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는 온전한 관심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심사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강남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판자촌 포이동이 그러한 일례이다. 타워펠리스 한가운데 있는 판자촌의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심을 갖는 타워펠리스의 거주민은 흔치 않다.

세대갈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집단 사이의 갈등, 그리고 연애와 우정을 파괴하는 개인간의 갈등은 행동이 포함된 온전한 관심을 둠으로써 예방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온전한 관심의 밑바탕에는 인간이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며, 평등의 개념을 재산이나 다른 부분에 부여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세상이 모든 타인에게 속해있다는 것에 부여하여야 한다. 서로의 세상을 인정하고 상대의 세상에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이야말로 상대를 직시하는 방법이며 단순히 외면을 뛰어넘어 상대의 의도와 생각을 파악할 수 있는 내면에 대한 관심이다.

집단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를 자신의 관심의 대상으로 두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의 보편성이 전 세상에 통용되는 보편성이라 인정하는 자세를 버릴 필요가 있다. 관심을 주는 대상은 인간이어야 하고 관심을 받는 대상 역시 인간이어야 한다. 집단에 속해 있는 자기 자신에 관심을 두기에 앞서서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온전한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두며, 동시에 타인의 세상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세상이 절대적이고 이 세상이 무너질 경우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만, 상대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 역시도 하나의 세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속해 있는 집단역시 구성원들이 구성하는 세상의 연장선상이다. 관계 속에서 사는 인간이 좁아지고 고통이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되는 현실과 스스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아적인 세상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승자를 단 한명으로 규정하게 되고, 승자독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결국 관심 역시 인간이 하는 행위이고 인간이 하는 사고의 과정이며 인간이 하는 말이다.

왜 인간인가? 장자는 이미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을 붙여 人間世 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사람이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 관심을 두고 관심을 요구하는 우리의 본성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참고 서적
Jean Baudrillard 『소비의 사회』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나 학교에서 하는 알바트로스 컨테스트에서 위에 글로 1등 했읍디다. 그런데 정말 개판으로 쓴 글에 최우수를 주신 이유는 순전히 아이디어가 좋아서였지 않을까 싶습디다. 이건 자랑인데 자랑이 아닙디다. 왜냐하면 내가 다시 읽어봤으나, 비문천지에다가 도저히 문맥상 연결되지 않는 잡다한 이야기들을 섞어 놓아서 좋은 글이 아니란 것을 나 스스로 알기 때문입디다. 하지만 어쨋든 주신 돈은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베리 머취, 앞으로는 글 정갈하게 쓰라는 뜻으로 알고 정진하겠습니다. 글 쓰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