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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3 신념부재. 글쓰기를 많이 하고 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적어내려가다 보면 무언가 걸리적 거리는 껀덕지가 있다. '직관'이라는 경험을 통한 표상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달아 본다. 한 예술가는 감각자료가 축적되어 있는 중에 특정 경험을 하면 표상이 맺힌다고 했다.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난다, 미학자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아침에 읽은 책 혹은 드라마 영화의 이미지가 어떤 사람과 저녁 식사를 할 때 떠올라 결합하여 모호한 인상을 갖게 된다면, 이는 일종의 표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지만 불명확한 껀덕지에 걸리적 거리는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적는 족족 제출을 하는데 곧 평가로 이어진다. 흔히 이러한 평이 나온다. "글을 장악하지 못함, 저자의 미끄러짐, 불분명.. 더보기
귀한 말이 되었다. 샤르트르, 말.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두자.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 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마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 더보기
궤변론자 수정1 얼마전에 읽었던 『헌법의 풍경』에서 저자인 김두식은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던 때에 한 교수의 수업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시험보는 기계를 양산하는 것과 다르게 실제 토론수업을 하고, 학생에게 윤리적,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수업 시간중에 지목된 학생은 주장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에 반박을 할 뿐이다. 마치 교수의 주장은 없고, 지목당한 학생의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해나가는 뿐인 듯 하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헤겔이 집대성한 변증법 즉 정과 반을 통해 합이라는 진보를 향한 도달과는 다르다. 변증술은 합을 향하여 나간다기보다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正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절대론적 윤.. 더보기
누군가의 글쓰기. 한 글쓰기 수업에서 감당하지 못 할 비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다시금 글을 쓴다. 이렇게 표현했다. "비유에게 미안했다." "칼날이 나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 비유와 은유로 잔혹한 현실을 비껴볼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든다. 정말 비유가 문제였을까, 사실 비유는 문제가 아니였을런지도 모른다. 비유와 은유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비스무리한 시각과 시야, 그리고 시력을 바탕으로 힘을 갖게 마련이다. 그는 서둘렀다. 문장은 문장을 휘갈겼던 그를 앞서 나아갔고, 쓰여진 문장의 겉모습은 글 안에서 균형잡힌 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기보다 그의 습관을 드러냈다. 각 문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문자의 사용이었을 뿐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정합성보다 .. 더보기
선택. 이성은 가능한 선택지를 추측하고 파악하는 능력일 따름이다. 선택은 감성의 역할이다. 호불호를 가늠하게 하는 감성의 역할이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고 행동을 만들어낸다. 경제학이 가진 대전제의 여파일까, 현대에 흔히들 말하는 합리적인 선택은 도구적 이성에 경도되어실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하나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헤게모니, 관습, 독단으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인간에 목을 매기에 우리 각자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