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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우연한 기회로 그리고 혼자였으면 결코 가지 않았을 문화생활이라 부르는 연극을 보러 갈 기회가 있었다. 벌써 닷새전의 일이다. 나는 일상과 다름없이 밥을 먹고, 지하철역으로 향했으며, 지하철을 기다렸다. 공기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무미했고, 평소와는 다른 정거장에 내려야 했으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현실의 무게가 무거웠을 뿐이었고, 3시간 후에는 이 무게가 더 무거워질 것이라는 예감만이 있었다. 대학로에 도착한 나는 극장을 찾아 어수선한 인파를 해치고 나아갔다. 그리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몇몇 반가운 얼굴들과 간단한 인사를 하고서 들어 선 무대에는 예상했듯이 몇몇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늘 해온 방식대로 장치들의 의미를 찾으려 분주히 눈을 굴렸다. 곧 어두워진 공간에서 나레이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특별한 기대가 없었던 탓일까, 말소리는 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인물들의 자세와 목소리는 처음 접하는 인위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연이어 두 인물이 등장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익숙치 않은 인간 날것의 냄새가 났다. 지금 막 사형이라고 했다. '죽음' 죽나보다. 곧 카뮈라는 이름이 스쳐갔다.

삼촌인 변호사와 남편 그리고 부인인 템플이 서 있다. 흑인 하녀였던 낸시의 죽음에는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숨겨져 있다. 남편이 자리를 뜬 틈에, 템플이 방을 나간 틈에, 그 틈마다 "이건 비밀입니다."라고 떠벌리며 변호사는 말을 건다. 변호사는 뭔가를 알긴 아는 것 같다.

상단부 오른편에 날짜와 시간이 계속 찍힌다. 이 시간이 시작점인지 마침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계속된다. 감히 영화에 따위라는 명사를 붙이고 싶다. 지금 이 시간은 나에게도 배우에게도 그리고 이 공간을 채운 모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손에 땀을 쥔다고 했던가, 발바닥에 땀이 찬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은지 오래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다.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다. 하지만 다리가 쉬 들리지 않는다. 옆에 앉은 친구의 숨소리가 들린다. 뒤에는 누군가 비닐잠바를 입고 왔나보다. 배우가 뱉는 날소리를 뺀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침착한 채로 욕지거리를 날리고 싶다.

흑인 여자 하인은 백인 여주인의 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죽이고 있다. 수치심을 잊고 싶다고 부르짖는 그녀는 여주인이 쾌락이라는 악을 쫓아 떠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백인 여주인은 흑인 여자 하인을 친절하게 낸시라 부르며 종잣돈을 챙겨주려 한다. 백인 여주인은 이전의 막에서 외쳤었다. "나보다 더 큰 악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어요." 백인 여주인이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는 모든 변명은 이 소리로만 들린다. 
"나보다 더 큰 악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어요." 떠나는 백인 여주인을 보는 낸시가 앞으로 수치심을 갖고 살게 될 아이를 죽였다. 아니 죽이고 있다. 극의 장면은 감옥으로 넘어간다.

"나보다 더 큰 악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어요." 템플의 목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는다. 무대가 새롭게 밝아졌을 때 온몸의 근육을 쪼이던 감각세포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자세를 고쳐잡고, 등받이에 등을 댔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배우의 입에서는 이제 말이 나온다. 현실로 돌아온 듯 했다. 낸시와 템플의 대화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 연극을 처음으로 접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었다. 모든 연극들이 이렇게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일까? 그리고 감옥지기는 아무도 믿지 않아 죽은 남자의 이야기를 했다. 죽었구나, 감옥지기는 비웃는 말투였다. 그리고 낸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 했던 반면 템플은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보았다. 버리려 했던 자식이고, 죽임을 당한 자식을 그리워 하지 않는 템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템플의 수치스런 과거를 담은 편지는 불타올랐다. 템플이 욕정을 품었던 남자는 살해당했다. 템플과 수치심을 공유했던 흑인 하인은 곧 죽는다. 이제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은 그의 남편뿐이다. 그는 템플의 과거를 덮어주겠다고 새롭게 가정을 시작하자며 손을 내민다. 템플의 악은 사라졌고, 더 이상 악으로 그녀를 끌어들일 일도 없을 듯 하다. 다시 한번 떠오른다. "나보다 더 큰 악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어요." 마약과 같은 안식인 것인지 가치관에 혼란이 온다. 그녀가 살인마를 따라간 것이 그리고 매음굴에 있었던 것이 죄라면 그녀의 죄는 사해진 것일까? 

배우들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극장이 밝아졌고,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신경과 근육은 갑자기 늘어져 통증이 왔다.  담배가 너무 피고 싶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에 대한 궁금함은 이제 뇌를 옥죈다. 순간 왜 연극을 보는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