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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장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키스 젠킨스 저, 최용찬 역.

역사를 읽는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 곳곳에서 필독서로 꼽히며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설파한다. 왜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할까? 나의 짧은 생각에 사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역사를 보는 나의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 인생살이 속에서 관계정립과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너무 추상적인데, 사실 잘 모르겠어서.ㅋ).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없이 호기심에서 펼친 책은 실상 "역사는 뭐?"에 한정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유방법과 자세를 가르쳐 준다. 오랜만에 쾌감을 주는 책이었다.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원제:Re-thinking History)』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역사를 어떻게 봐야할까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책의 제목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뀌었는데 역자이신 최용찬씨의 이해가 돋보인다. 책의 제목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두는 역사 속에 살고 있고,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과연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키스 젠킨스는 응답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 아는 것이 역사란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고."

 

100년 후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남아 있다면 주류사학은 지금을 이렇게 적을 것이다. 아래서 다루겠지만 이는 '나'의 관점이 만들어 낸 '나' 해석이다.

 

대한민국 건국초의 정치상황은 남북대치상황에서 비롯한 독단적인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항하는 세력간의 갈등으로 인한 혼란기였으며, 남쪽에서는 일제의 권력을 친일세력들이 물려받아 세습의 성격을 띈 권력이 정부를 세웠다. 열강의 힘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한반도를 두고 소리없는 쟁탈전을 벌였으며 그 결과 한반도에는 두개의 정부가 수립된다. 그 덕택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분법적인 대립구도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아, 남북 각각의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은 수면 위로 부상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당시의 남한은 과두제의 성격을 지닌 후진적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였고, 북한은 일당 독재의 전제정치가 자리잡았다. 20세기와 21세기의 세계는 후기자본주의에 도달하여 실물경제로부터 독립적인 서비스 위주의 금융경제가 맹위를 떨친다. 북한은 스스로를 고립시켰으며, 남한의 정부는 재벌과 결탁하여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펴고 국민들의 후생복지보다는 '파이를 늘리는 방식인' 선성장 후분배라는 미명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 외에도 마르크스역사학자, 페미니즘역사학자, 민중사학자 그 외에 새로이 대두될 XX사학자들은 위와 같은 역사서술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큰 맥락에서 역사관의 근저에 엇비슷한 공통분모를 가질 것이며, 스스로의 세계관과 결합한 또 다른 역사서술을 해 나갈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역사가의 손으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쓰일 것이며, 저자가 말하듯 지금까지 '나'를 생산해 낸 시대가, 혹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하듯 '나를 저술한'(written me) 시대가 마찬가지로 우리를 저술해 왔고 이후에도 계속 우리를 저술해 나가게 될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서술하고 있으며, 서술하는 과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모든 증거는 사실 역사가의 취사선택일 뿐이다. 인식론적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fact도 발을 디디고 있는 세계를 무시하고서 관찰 할 수 없다. 과거를 본다고? 이미 지난 일이다. 우리는 떠올리고 생각하며 서술할 뿐이다. 상대성이론의 시간여행 역시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상대적으로 느리게 도착하는 것을 시간여행이라 말한다. 지난 일이 fact라고? 지난 일은 지난일이고, fact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다. 그럼 실제로 역사가 있을까? 책은 끊임없이 가르치려 든다. 과거가 있고, 역사는 과거를 서술한 결과물일 뿐이라고.

 

carr와 엘턴의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오직 '증거'라는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지 않는 길 외에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1)과거는 이미 발생했고, (2)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3)이 흔적들은 역사가가 다가와 발견하든 말든 상관없이 거기에 존재하고, (4)증거라는 용어는 어떤 흔적이 어떤 주장(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로' 이용될 때 쓸 수 있는 용어이지, 그 이전에는 사용될 수 없다.

p.144  

 

종래에 역사연구의 기본규격은 실증주의적인 역사관이었다. 실증주의[각주:1]라 함은 엘턴이 추구했듯이 역사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말이 없지만 실재하는 흔적을 들고서 증거로 제시하고, 그 증거가 다른 증거와의 관계속에서 구성하는 면을 파악하여 각주를 단다. 흔적은 실재했다는 증거가 되고, 각주는 증거가 하는 말이다. 증거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 실증주의의 목표이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주체가 절대적인 독립성을 갖출 수 없다는 사실은 '주체의 해체' 즉 포스트 모더니즘 정신이다. 개별주체가 절대적인 독립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아는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와 세계 안에서 규정된다. 편견없는 인간은 가능하지 않다. 편견이 없고 정합성을 담지하는 통계와 수학적인 결과조차도 절대적인 객관성있는 가정을 기본 전제에 두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전제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모래위의 성과 다를 바 없다. 실재하는 증거조차도 인간이 설명하고, 역사 서술은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다.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옛 애인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선물, 사진, 편지는 분명히 남아있지만 각자가 기억하고 상기하는 바는 다르다가 사실과 같지 않을까? 현재 애인과의 상태에 따라 각자는 편견을 갖게 마련이고, 이 편견을 깨부실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늘 객관적인 이면에 주관적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관습에 사로잡혀 객관적이라 여길 수도 있고, 미개한 외부인이 봤을 때는 주관적으이라 여길 수도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역사읽기로 들어선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진흙 발을 가진 인간으로 선다. 숙고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라지고, 분명하게 옳은 것도 그렇다고 분명하게 그른 것도 없어진다.

 

"'입장이 부여되지 않은 중심'은 언어적으로 모순이다."라고 저자는 밝힌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야할까?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중심을 잡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비단 역사를 볼 때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 늘 부딪힐 문제가 된다.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하며 스스로 답한다. "역사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나도 마찬가지다) 이미 해석 행위를 하엿다는 사실을 명백히 고백한 것이다. p.189"

 

글의 전반에서 하나의 진리와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실증주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어용학자라고들 한다. 연구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권력과 얼버무려진 하나의 (객관적이라 여겨지는) 상식을 요구한다. 상식이 없으면? 자연스레 몰상식이되고 이상한 놈, 미친 놈, 또라이, 병신이 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비판을 하고 기존의 방식이 그르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자기고백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까지도 비판해라, 그리고 생각해라.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교과서나 책에 나오는 단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일련의 '현재의 역사들'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동의할 수 있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상호 충돌하는 정당화 작업에 연루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같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이 반드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를 생산해 낸 시대가, 혹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하듯 '나를 저술한'(written me) 시대가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저술해 왔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분을 저술해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시대라고 규정하고, 역사의 본질을 다룬 '포스트모던세계의 역사연구'의 장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확실히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 세계에 살고 있다.                                      

p.36  

 

인식론(Epistemology: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episteme에서 유래)은 지식에 대한 이론들과 관계된 철학적 영역을 가리킨다. 이 영역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다른 담론이 철학의 일부분이며, 지식이라는 영역에 관한 한 '과거'에서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물음에 뛰어든다. 솔직히 이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인식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역사 속의 과거'같은 주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따라서 그러한 지식은 모두 가설이며, 실제로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 전제와 무게 아래에서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창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특정한 역사만이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생겨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은 각각 권력(power)과 관계를 맺게 된다.       

p.52

 

역사란 인식론, 방법론,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다. 인식론은, 실제 과거란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와 역사(서술)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은 존재론적인 것으로서 사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인식론적 노력으로도 메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역사의 본질에 다가가려 하지만 모두는 나름의 방법을 따르기 때문에 중심개념은 편파적인 구성물일 뿐이다. 어떤 역사도 사람과 계급과 집단에 의한 자서전적인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역사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지배적인 힘이 공공연한 권력이나 은밀한 개입을 통하여 통제할 뿐이다. 역사는 서술된 과거의 편린일 뿐이다.        

p.73

 

1. 진실은 역사담론 안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2. 객관적 역사란 실제로 존재하는가(객관적'사실'이란 실제로 존재하는가)? 만일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고작 해석에 불과한 것인가?

3. 편견은 무엇이며, 이를 버리고자 할 때 어떤 문제들이 파생하는가?

4. 감정이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로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며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가정이입을 위한 노력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5. 1차 자료와 2차 자료(흔적)의 차이, 그리고 '증거'와 '자료'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6. 개념쌍(원인과 결과, 연속과 변화, 유사성과 차이)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며 이 개념쌍을 사용할 경우 요구되는 임무는 완수할 수 있는가?

7. 역사는 예술인가, 과학인가?  

p.94


열린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란 내적 가치(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이다.. 그러한 시장에서는 사람들은 구매대상의 외관에 매혹되어 외부적 관계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찾는다. 결국 모든 우상은 (언젠가는 허물어져 내릴) 진흙 발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회의주의, 좀더 심하게 말해 허무주의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이고 근원적인 지적 전제들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p.176


  1. 실증주의 역사관의 전제는 "과거가 객관적으로 다시 창조 될 수 있다."이다. 실재하는 증거를 기반으로 편견과 속견없이 있는 그대로 과거의 흔적이 말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