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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개

누군가의 글쓰기.

한 글쓰기 수업에서 감당하지 못 할 비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다시금 글을 쓴다. 이렇게 표현했다. "비유에게 미안했다." "칼날이 나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 비유와 은유로 잔혹한 현실을 비껴볼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든다. 정말 비유가 문제였을까, 사실 비유는 문제가 아니였을런지도 모른다. 비유와 은유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비스무리한 시각과 시야, 그리고 시력을 바탕으로 힘을 갖게 마련이다.

 

그는 서둘렀다. 문장은 문장을 휘갈겼던 그를 앞서 나아갔고, 쓰여진 문장의 겉모습은 글 안에서 균형잡힌 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기보다 그의 습관을 드러냈다. 각 문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문자의 사용이었을 뿐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정합성보다 적당한 수준의 모순으로 스스로의 세계를 드러냈다. (모순과 정합성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가치판단은 배제한다.)

 

'내가 그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나를 그에게로 투영하는,'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역시나 비유와 은유를 이해시키고, 이해하는데에 가장 기초적으로 자리한다. 결국 비유와 은유는 글 안에 포섭되어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하며, 역량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아쉽게도 글은 단독적이며 개별적으로 완벽한 대상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 '우리'는 언어의 수인."이라고 말했듯이 글쓴이가 언어와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단독적이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디든 존재하고, 어디서든 독자와 글 사이에서 단 둘만의 결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쓴이가 의도하는 바가 설령 있었더라도 그렇게 읽힐 것인가는 기대 할 수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만큼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던가? 애를 놓은 기분이라고, 이제는 커가는 과정을 볼 뿐이라고. 결국 글쓴이는 스스로의 글을 지배할 수 없다.

 

그는 글을 세상에 내놓았고, 타자에게 읽혔다. 그의 육성이 자신의 글에 가감하는 해석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대를 벗어난 바람소리는 청자들의 귓가를 울렸고, 글과 독자가 갖는 둘만의 시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비유와 은유를 이해하기에는 공감의 능력이 결여되는 시간, 스스로의 내적정화를 위해 애쓰는 짧은 글쓰기는 공감이 없는 해석 속에서 난도질 당했다.

 

최소한의 공감에 대한 노력이 있었더라면 글쓴이였던 그에게 가학적인 문장을 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던진 순간 들려오고, 소화하는 순간 기억이 된다. 편린으로 남은 기억조차도 끊임없이 희구되며, 새로워진 기억이 생각과 행위를 더 나아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적은 글은 타자에 대한 인터뷰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국에 이르러서는 거울 속 인터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인터뷰가 되었다.

 

나의 글쓰기는 남에게 어떻게 읽힐까, 그가 와서 읽어 볼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이렇게 한번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