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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장

승무 - 1

달큼 상큼한 꿈에서 깬 뒤 머리 속에 꿈보따리가 펼쳐졌다. 꿈 보따리는 이야기 보따리였는지 하염없이 온 세상의 하소연과 허풍을 쏟아냈다. K는 눈이 나빠서 자고 일어나면 눈에 뵈는게 없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는 안경을 찾지 손을 뻗지 않았다.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게슴츠레 눈을 떴다. 벽지를 바라보니, 여태까지 파스텔 톤의 하늘색인 줄만 알았던 벽지 곳곳에 자그마한 무늬가 박혀있다. 꾸물거리는 지렁이 모양같기도 하여 잠시 집중하니 그 옆의 무늬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눈에 뵈는 게 없는 K는 움직이는 하늘색 지렁이에 눈길을 보내본다. 하지만 웬걸 꿈틀거린 무늬를 시선 속에 가두자 무늬들은 움직임을 멈춰버렸고, 곧이어 시선 밖의 무늬들이 다시금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포기했다. 일어나봐야 당장 할 것이 없다. K는 조금 더 침대에 누워있기로 한다.

 

그리고 꿈 보따리를 정성스레 풀어헤치려 눈을 감았다. 컴퓨터가 인간의 기억하는 방식을 따라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컴퓨터 이론 수업을 듣기 전에는 단기 기억력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단기 기억력을 되살리려면 얼른 단기 기억력을 사용했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꿈 보따리에 집중하자 지렁이가 떠올랐다. 지렁이가 떠오르자 벽지의 하늘색이 떠올랐고, 금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기억들로 전환되지 못한 오늘의 꿈은 있던 듯 없던 듯 파기되었다.

 

꿈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보따리를 여며 장농에 넣는 이불처럼 고이 접었다. 여기까지 적자 조치훈의 시 승무가 떠올랐다 "나빌레라."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는 조치훈의 펜 끝에서 살아났다. 아마 K는 고등학교 혹은 중학교 시절에 '승무'라는 시를 배웠을 것이다. 시의 전반에 깔려 있던 감흥은 여태까지 남아있는 한국식 교육의 잔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러한 방식으로라도 배우지 않았다면 K의 인생에 시가 들어올 기회는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바람에 눕는 풀을 노래한 김수영[각주:1]의 탄식과 누군가에게 뜨거웠던 사람이었냐는 안도현[각주:2]의 일갈 그리고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냐던 이방원의 침발린 협박, 이몸이 백번은 고쳐죽겠다던 정몽주의 지조[각주:3]까지.

 

어쩌면 K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대로 시를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K는 기억에 남는 국어선생님이 없는데, 운수 좋게도 국어선생님들의 성품이 유하시어 K가 수업시간에 청하는 잠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들었던 기억도 인상적인 수업을 하신 선생님에 대한 기억도 없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기억에 남아있는 시구들은 감각적으로 뇌리에 박혀 있다. 꿈이 떠오르지 않던 것과 달랐다.

 

인간의 가치는 통약불가능했다. K는 인간의 가치가 늘 다양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물며 K가 K의 눈으로 바라보는 벽지의 무늬조차도 각도에 따라 꿈틀거리는 환상적인 경험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는 단어들 사이로 문득 '나빌레라'는 왜였을런지 의문이 들었다.

 

 

 

  1. 김수영의 풀 [본문으로]
  2.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본문으로]
  3. 이방원의 하여가 와 정몽주의 단심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