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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장

퀴즈쇼, 김영하.

"어느 고등학교 교훈에 그런 게 있대. '어머니와 약혼자가 반대하는 직업을 가져라.' 그게 무슨말인지 이제 알 것 같아. 말하자면 안정도 좋지만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한다는 거야." 빛나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내가 오빠를 잘못 생각했었나봐. 오빠는 아무래도 안되겠어. 뭐랄까. 뼛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 오빠는 이러니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실은 그냥 놀고 싶은거야.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거지. 안 그래?"

p.92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다. 책을 읽던 나는 한대 맞은 기분이 든다. 엄연히 "오빠" 민수는 현대를 살아가는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은 졸업생이며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지 않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하는 백수이다. 급작스럽게 그에게 다가 온 현실은 민수로 하여금 소중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삶의 부분들(집, 책등)을 팔아야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한 삶 속에서조차도 그는 이야기한다. 꿈을 꿔야한다고, 그리고 안정보다는 변화를 꿈꿔야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꿈을 가진 그는 소설이라는 현실 속에서 단지 지갑속의 지폐수를 항상 기억해야하고, 술 한잔 값을 치루며 그 다음날을 고민해야하는 빈곤한 청춘이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지만, 그곳에는 인간사이의 예절 혹은 인간적인 면보다는 빈곤한 편의점 알바생과 그 주인사이의 임금에 의하여 굴러가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의 연속만이 더해진다.  

그리고 민수가 살고 있는 한 사람이 누우면 가득 차는 고시원에 역시 삶의 모습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에 자리잡은 모습들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언저리에서 뛰어내릴 바다를 바라보며 절벽을 타는 젊음들의 군상이다. 민수는 우연한 기회로 일확천금이 가능한 퀴즈대결에 참여하게 되나, 이 역시도 일확천금을 노리던 젊음에게 허무한 결말만을 가져다 준다. 

"외국 다니실 때 책방은 누가 보나요?"
"문닫고 가야지, 뭐. 근데 왜?"
"혹시 사람 안필요하세요?"
......
주절주절 신나게 떠들던 수집가는 갑자기 자본가로 변신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양순한 얼굴로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마침내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은 얼마 못 줘."
......
그렇게 장밋빛 꿈을 거창하게 떠들고 자기 자신마저 속일 때의 그는 또다른 이춘성이었다.
p.517-518

일확천금의 허무한 세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그는, 나름 세상과의 타협점을 찾게 되고, 그 타협점은 그의 과거가 만들어 준 하나의 기회이다.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물질만능을 넘어서 금전=신 주의로 치달아가는 주인공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나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저자의 작은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민수가 도움을 청하는 그녀. 민수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그녀, 앞으로 서로 더 알아가자는 그들의 이야기에 뻔히 예상된 결말이지만 이토록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