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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장

칼의 노래, 김훈 외 짬뽕

나는 강하지 않다. 이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책장을 훑었다. 한눈에 들어온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 이순신의 이야기였다. 이순신을 해전의 천재라고 한다면 내 책장에는 두명의 천재가 앉아있다.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 그리고 이순신. 실재했던 그들은 누구였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1년 10년 100년 1000년 실수로 1000년까지 올라갔다. 뭐 별거 있으랴, 이순신이고 모차르트고 지금 태어났다고, 10000년전에 태어났다고 그 고독을 이길 수는 없었을 거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되는 운명이 두려웟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김훈, 칼의 노래, p.239


실패, 충족되지 않는 사랑의 욕구, 자기 존재의 무의미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냥 포기해버렸고 그래서 죽었던 것이다 - 성공과 명성은 바로 다음 길코퉁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모든 게 실패처럼 보였을 것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p.100


마찬가지였고,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두려워했고, 고독했을 것이다. 홀로 있지 않음을 이해받으려는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이순신은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맸고, 모차르트는 죽음에 가까워진 순간 마침내 삶의 의욕을 포기했다. 내면의 욕망에서 비롯한 상실에의 두려움은 결국 고독과 불안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마르케스의 100년동안의 고독이 떠올랐다.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상징들이 지금의 내게는 특정한 의미를 지시한다. 가족은 나고, 나는 가족이다. 일족 중 누구도 일족 밖의 누군가를 만나서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독은 일족의 내적 결합으로  종착지를 찾고, 나인 가족은 결국 나 내부의 동력을 통해서만이 해소된다는 말이었을까. 그리고 그 해소는 일족의 소멸로 이어지지만..


헤르만 헤세의 홀로라는 시를 적어두고 싶다. 


세상에 

길은 수없이 많지만 

모두가 

목적지는 같다.


말을 타거나 차를 타고 달릴 수 있고

둘이서, 셋이서 달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걸음은 

혼자서 디뎌야 한다.


때문에 모든 고난을 

혼자 짊어지는 것보다

더 나은 지식도

능력도 없다.


그런데 살고 있고, 여 위에 인간들은 그래도 나름 다 유명한 양반들이었다. 그 죽일놈의 자기 인정 욕구라고, 나보다 똑똑한 이 양반들도 그랬으니 이정도 우울이야 별일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고, 비슷한 감정을 갖는다는 평등한 인간을 외치면서 다 고민하고 고독해지는 것이라고 잠시나마 위안해 봤지만, 어쩌냐. 내 감기가 남의 암보다 더 아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