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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 김연수.

고개를 들어보니 고동색 군복에 각반을 찬 일본 병사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 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 있는 자들이 함꼐 살아가는 세계라면,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라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계가 가짜일 때,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 있을 때,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구도 주인이 아닌, 노예만의 세상에서 폭력은 예술이다. 단 한 명이라도 죽어가는 노예가 있는 한, 세계를 바꾸기 위한 폭력은 불가피하다. 나는 폭력이 사라진 세계를 믿지 않게 됐다. 어느 세계에나 죽어가는 노예는 있을 테니까 어느 세계에서나 폭력은 예술이 될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란 없다. 유토피아란 폭력을 은혜하려는 자들의 거짓 관념에 불과하다. 오직 끝없는 투쟁만이, 오직 무자비한 폭력만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젊음이란, 그들이 프르른 나무 아래에서 꿈꾸던 세계란, 그 노란 군복 안에 감춰진 살처럼 여리다. 권총 한 발이면 그 살은 부드러움을 잃고 굳어간다. 그날, 내 곁을 지나가던 젊은 이국 군인들의 표정처럼.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살은 견고하고 딱딱한 세계를 지향한다. 인간의 살은 결국 폭력을 그리워하게 된다. 누구도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p.291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는 세계와 끊임없는 투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곧추 서있을 수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