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장

책 [무진기행] 김승옥, 민음사

[무진기행] 김승옥, 민음사, 2007.

0.
여행길에 여러 번 챙긴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읽을 때 마다 나에게 새롭다. 이번에는 무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공허하다고 표현한 부분과 무진으로 가는 길에 “수면제”를 공상한 부분이 눈에 밟혔고, 아래는 그 중 “수면제” 부분.

1.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장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11면)

2.
“저런 여자들이 먹은 건 청산가립니다. 수면제 몇 알 먹고 떠들썩한 연극 같은 건 안 하지요....” 나는 무진으로 오는 보스 칸에서 수면제를 만들어 팔겠다는 공상을 한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사실 그 수면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32면)

#북스타그램 #무진기행 # 김승옥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