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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개

내 변명이랍시고 적어두는 잇힝 20120823

증말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는 짓일 거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이 무지하게 발달해서 인터넷을 통해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싸이월드 그 외에도 이것 저것 많아졌다. 아마 내가 모르는 게 또 있을 거다. 은근 잠수를 타왔는데(잠수 탔다고 하기에는 남사스럽기도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잠수가 아닐까-_-) 사람들을 덜 만나면 덜 만날수록 인터넷을 통해 비춰지는 얼굴에 더욱 더 신경을 쓰는 느낌이다. 가시가 뾰족뾰족하고 못 생긴 글을 쓰면 내 얼굴은 어떨까? 하고서는 거울을 봤는데 뭐 준수하다. 얼굴 아래 붙어 있는 곳곳이 조금씩 처짐은 내 눈에만 보이니깐 건너 뛰겠다. 글은 건강하지 않을 수 있는데, 여기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거고, 불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비건강함이다. 그런데 내 진짜 얼굴이 건강한지 아닌지 비교 대상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간간이 적어서 남긴 것으로 내 얼굴에 흉터가 많은 것처럼 내 글의 흉터를 곱씹는다. 계속보니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버린다. 글을 지금의 내 얼굴인 것 마냥. 각설하고 누군가 보기에 이 글은 비건강해 보이는데 글을 낳은 내가 그게 내 책임이 아니야라고 강변하면 오성과 한음 이야기에서 권율이었나? 그 양반을 엿먹인 오성인가 한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새파랗게 어린 시키가 방 밖에서 권율(당시 판서대감 아니면 삼정승 중에 하나였을 거다.) 영감의 방 창호지에 펀치를 날려 불쑥 팔을 들이밀면서 "이 팔은 누구의 팔입니까? 왼팔도 오른팔도 저의 팔이 아니덥니까?"라더라. 니가 한 거는 니가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몸이 안좋으면 정신도 병든다, 정신이 병들어서 그런거다. 결국 건강하지 않은 몸에 건강하지 않은 정신이 담겨서 건강하지 않은 글이 출생하였다. 이런거.

 

어떤 가치가 파생되든 읽기나 쓰기는 다 좋은데 실은 머리 속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같다. 바다에서 파도가 치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나조차도 상상력의 바다에서는 다 할 수 있으니깐. 버터플라이, 개수영, 프리라이딩, 뭐 안되는 게 없다. 하물며 10m높이에서 다이빙 한 다음에 솟구쳐 15m를 날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내 잠수는 집이 아니고 내 머릿속이었을지도 모를런다. 위험한가? 위험하다. 경험이 밑바탕되지 않는 글쓰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뭐 흔해빠진 말이지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뭐해서 먹고 살래?라는 질문에도 꼬리가 말려 버린다.

 

이렇게 적고서는 마지막에는 또 이렇게 적어둔다. 읽는 사람은 역시 얘는 어쩔 수 없군이라는 생각이 들테다. 우리는 꿈을 꿔야지 건강하다고 여기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건강한 정신을 갖는다고 여기는데, 결국 Good-World를 신봉하는 거다.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신화는 공유되어야하는 일종의 규칙으로 남겨져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각주:1]가 보고 가면 개가 똥싸고 간다고 할 이야기지만, 그렇게 우리가 살아왔고 그나마 살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암. 어쨋든 여기서 같이 놀려면 이 세계가 구리지만은 않다고 여겨야 하는데 어찌보면 유토피아까지는 아니지만 디스토피아여서는 안되는 것이 이 세상. 그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다면 자연스럽게 규칙을 파괴하려는 놀이파괴자인 거다. 그렇다면 빠져나와야 하는데 디스토피아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유토피아를 꿈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잇힝. 마치 게임이 싫다고 게임을 때려치는 것보다 게임을 함께 하며 사기를 치는 사기게임꾼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것과 같지.[각주:2][각주:3] 내가 둘 중에 뭐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런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고, 이렇게 굳이 쓰잘데기 없는 다리를 달아서 글을 무겁게 만든다.


  1.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을 비롯한 저서에서 노예도덕(약자의 도덕)과 주인도덕을 언급한다. 내 설명보다는 읽어보는 것이 좋을듯.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99870&mobile&categoryId=1111# [본문으로]
  2. 호이징가는 그의 저작 <호모루덴스>에서 조심스럽게 문화 혹은 사회를 하나의 놀이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놀이의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대중으로 두고, 놀이파괴자(놀이의 규칙을 부정하는 사람)와 사기놀이꾼(놀이의 규칙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놀이파괴자를 중세 마녀사냥 때의 마녀로, 사기놀이꾼을 중세 마녀사냥 때의 성직자로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놀이파괴자를 스피노자나 칼뱅, 루소, 루터 같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더 쉽겠지만 이 양반들은 근대 초입이고 지나치게 특수하기 때문에 조금 무리수. [본문으로]
  3. 적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놀이파괴자는 기존의 규칙을 파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는 점을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마녀사냥의 마녀는 놀이파괴자로서 대상화되는 것이다. 엄밀한 개념으로 사용하였을 때 스피노자, 루터, 칼뱅, 루쏘등의 인물은 주체로서의 놀이파괴자라 말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