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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개

한살이

오늘이 가는 것도 두렵고, 내일이 오는 것도 무섭다. 그 다음 날이면 괜찮을까?라고 자문해 보지만 누구에게 묻고,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지도 알 수 없다. 실존을 인식함은 고통이라, 고통의 까닭은 나의 현재 좌표를 알 수 없기때문일테다. 책을 읽어 어디쯤 와있는지 궁구해보아봤자 이미 궤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다만 내 속을 파먹는 구더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 안의 구더기가 이만큼 커졌어. 더 크고나면 파리가 되겠지. 기생충에게 뇌를 파먹혀 밤마다 양의 아가리를 찾아 헤매는 일개미처럼, 하염없이 까닭모르고 거실을 배회하는 파리 한 마리. 오늘도 내일도 돌고 돌며 누군가가 전화번호부를 집어던지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럼에도 전화번호부의 무게가 겁나 생각없이 피하다가 습관적으로 날개를 접은 순간, 겉날개에 인간과 같은 붉은 피를 남길 것이 뻔하다. 그때에 나의 일부였던 파리의 좌표는 이미 구닥다리 썩은 인쇄지의 전화번호부 좌측 하단 어딘가로 확인될 터이다.
왜 이곳을 헤매고 있는지 그래서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그 질문에 선문답을 주고받던 이들은 인간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고, 좌표를 확인했기를 바랄 뿐이다. 파리의 실존은 까닭모를 8자를 그리며, 단지 8자를 무한히 반복함을 밝히고 만다. 이를 위해 파리는 한살이를 했다. 한살이는 한에 찬 살이일까, 하루의 살이일까. 사전에는 벌레의 탈피와 변태 과정의 한 주기라고 적혀있다. 나는 이 한살이라는 단어에서 한에 찬 삶이 떠오를 뿐이다. 내 속을 파먹는 구더기가 웬간히 성장해 축축한 날개를 말리고 날아간다면, 나는 신문을 접고 손에 집어든다. 파리가 앉기만을 기다리며 유심히 관찰할 것이다. 파리가 날개를 접은 순간 나는 신문지를 후려쳐 x월 x일 신문 하단 왼편에 붉은 반점과 부스러진 벌레조각을 찍고, 좌표를 확인해 줄 것이다. 파리를 살해한 신문지를 든 나는 인간의 하나가 되었다며, 마찬가지로 내 안에는 구더기가 원래 없었다며 눈을 흐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