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 - 1

연습장 2013. 6. 18. 17:28

달큼 상큼한 꿈에서 깬 뒤 머리 속에 꿈보따리가 펼쳐졌다. 꿈 보따리는 이야기 보따리였는지 하염없이 온 세상의 하소연과 허풍을 쏟아냈다. K는 눈이 나빠서 자고 일어나면 눈에 뵈는게 없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는 안경을 찾지 손을 뻗지 않았다.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게슴츠레 눈을 떴다. 벽지를 바라보니, 여태까지 파스텔 톤의 하늘색인 줄만 알았던 벽지 곳곳에 자그마한 무늬가 박혀있다. 꾸물거리는 지렁이 모양같기도 하여 잠시 집중하니 그 옆의 무늬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눈에 뵈는 게 없는 K는 움직이는 하늘색 지렁이에 눈길을 보내본다. 하지만 웬걸 꿈틀거린 무늬를 시선 속에 가두자 무늬들은 움직임을 멈춰버렸고, 곧이어 시선 밖의 무늬들이 다시금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포기했다. 일어나봐야 당장 할 것이 없다. K는 조금 더 침대에 누워있기로 한다.

 

그리고 꿈 보따리를 정성스레 풀어헤치려 눈을 감았다. 컴퓨터가 인간의 기억하는 방식을 따라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컴퓨터 이론 수업을 듣기 전에는 단기 기억력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단기 기억력을 되살리려면 얼른 단기 기억력을 사용했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꿈 보따리에 집중하자 지렁이가 떠올랐다. 지렁이가 떠오르자 벽지의 하늘색이 떠올랐고, 금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기억들로 전환되지 못한 오늘의 꿈은 있던 듯 없던 듯 파기되었다.

 

꿈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보따리를 여며 장농에 넣는 이불처럼 고이 접었다. 여기까지 적자 조치훈의 시 승무가 떠올랐다 "나빌레라."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는 조치훈의 펜 끝에서 살아났다. 아마 K는 고등학교 혹은 중학교 시절에 '승무'라는 시를 배웠을 것이다. 시의 전반에 깔려 있던 감흥은 여태까지 남아있는 한국식 교육의 잔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러한 방식으로라도 배우지 않았다면 K의 인생에 시가 들어올 기회는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바람에 눕는 풀을 노래한 김수영[각주:1]의 탄식과 누군가에게 뜨거웠던 사람이었냐는 안도현[각주:2]의 일갈 그리고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냐던 이방원의 침발린 협박, 이몸이 백번은 고쳐죽겠다던 정몽주의 지조[각주:3]까지.

 

어쩌면 K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대로 시를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K는 기억에 남는 국어선생님이 없는데, 운수 좋게도 국어선생님들의 성품이 유하시어 K가 수업시간에 청하는 잠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들었던 기억도 인상적인 수업을 하신 선생님에 대한 기억도 없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기억에 남아있는 시구들은 감각적으로 뇌리에 박혀 있다. 꿈이 떠오르지 않던 것과 달랐다.

 

인간의 가치는 통약불가능했다. K는 인간의 가치가 늘 다양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물며 K가 K의 눈으로 바라보는 벽지의 무늬조차도 각도에 따라 꿈틀거리는 환상적인 경험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는 단어들 사이로 문득 '나빌레라'는 왜였을런지 의문이 들었다.

 

 

 

  1. 김수영의 풀 [본문으로]
  2.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본문으로]
  3. 이방원의 하여가 와 정몽주의 단심가 [본문으로]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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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깝깝한 눈꺼풀을 벗겨낸 이후의 새로운 장막을 뚫고 나가려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어려운 이유는 이리저리하여도 내 머리에 고정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을 읽는 눈이 두 개인 탓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간단하게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어서 현시적으로만이 알 수 있는 현재의 사실을 여러가지 요소로 찢어서 원인과 결과라고 이름붙이고 원인을 과거에서 찾고 현재 발생한 사건과 위치상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원인으로 둘 가능성을 가장 높게 치겠지만 지금 사무실에 앉아서 이렇게 블로깅을 투닥투닥거리는 손가락 중에 엄지손가락은 타자 치는 데에 쓰이지 않아서 잠시 들여다보니 엄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 사이에는 백태가 껴 있어서 아 더럽다고 생각을 하여 내가 손을 안씼었나라고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실은 이 또한 씼어낸 후에 다시금 들러 붙어 깝깝한 눈꺼풀처럼 까닭을 잃은 손까닭처럼 손만 남아서 백태가 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내게 다시금 이야기를 해줄 즈음 나는 다시금 세상을 읽는 두 눈이 내 머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시적인 것만이 확인가능하고 미래는 예측할 뿐이라는 나만의 진리를 다시금 곱씹을 것이고 이 블로깅을 올리기 위해서 저장을 누르고서는 손을 씻으러 갈 것이라는 예측했던 미래의 사건을 실현하기 위하여 움직이겠다면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미래를 예상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인가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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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염치.

연습장 2012. 11. 1. 23:44

붉은 저녁의 태양은 크다. 태양이 원래 하얀색인지도 모를일이다. 어느 날 부터인가 유리로 덮인 마천루가 들어섰고, 그 사이로 새하얀 태양에 눈이 부신다. 터져나오는 빛과 그 뒤로 붉은 하늘, 눈이 부셔 태양을 바라볼 수가 없다. 하얗게 타들어간다. 태양의 빛줄기에 타들어가는 건물들 사이를 헤치고 나서는 버스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서 바라만 봤다. 눈이 부시다고 생각할 찰나에 어둠이 깔리고, 익숙해질 즈음해서 다시 눈이 부시고, 다시 어둠이 깔리고 눈이 부시고, 어둡고 부시고, 그러다 보니 집에 왔다. 염치가 없어 부끄러운 나는 얼굴을 가릴 틈도 없다.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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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등록금. 수정1

연습장 2011. 7. 18. 00:13


어느새 반값등록금에 대한 관심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관심을 잃기 시작한 주체는 대학생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등록금을 내는 다수의 대학생은 단 한시라도 관심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대학생들이 등록금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기업 혹은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의 일부로서 등록금 혜택을 누리는 대학생들에게
등록금문제는 강건너 불구경이다. 
"그래 힘들겠다, 안됬네, 등록금 너무 비싸기는 하지, 국가가 그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냐?"
국가의 기능에 대한 맹신.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인 시각, 승자독식,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편승의 권리는 없다."라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가진 세계관의 일부가 되었다. 등록금 정책은 복지의 한부분으로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혜택을 모두가 누리는 것은 불공평하다. 

노력하지 않은 자가 편승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자연스럽게 등록금 혜택은 선별의 과정을 거친다. 
선별적인 등록금 정책은 자연스럽게 복지가 아닌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유산자가 베푸는 행위가 된다.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하지만 여전히 절차적인 부분에만 집중한다.

선별은 기본적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위반하며, 복지의 수혜자는 선별된다.
그들은 혜택을 누리며 대학교육을 보장받는다. 다른 여분을 관찰할 기회보다는 체제안에서 살아남는 하나의 방법으로 복지 제공자가 만든 원칙을 따른다. 그들은 수혜자로써의 입장을 고수해야만이 신분상승(재산으로 규정되는)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베품을 행하는 유산자는 자연스럽게 반대급부를 원하게 되며 복지는 보편성을 잃는다.

이미 사회 중산층의 기본조건이 된 대학이라는 통과의례는 그 성격을 공고히 한다. 대학은 베푸는 자들의 논리를 가르치는 그들의 전당으로 변할 여지가 다분하다. 평등의 개념이 사라지는 순간 그 행위는 복지가 아니다. 

평등하다는 사실, 그리고 평등의 생활화는 선별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복지에서 
그리고 복지란 보편적인 것이라는 개념화하면서 시작되어야 한다.

흠 수정1.

읽어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니 레포트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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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권고마 2011.07.24 1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이야기 인 거임?

"사회학자 로봇 벨라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정치적 가치가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일본사회에서는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가족, 회사, 일본 등)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이는 진리나 정의에 대한 헌신보다도 집단에 대한 헌신이 우선시 되는 경향을 뜻한다."
 

대지진 이후 간토지방은 초토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언비어의 전파(조선인이 폭도화되어 방화, 약탈을 한다는 내용입니다.)로 일본인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혹은 타개할 수 없는 불만을 이방인에게 풀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고요. 이것을 보고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잠시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발생한 대지진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로 독도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일본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진에 대한 불안을 잊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불만을 폭발시키기 위해서 다른 분출구를 찾습니다.
 

그리고 소소한 지진들은 일상의 하나일 뿐이지만, 지속되는 지진의 발생은 일본인을 불안속에 살도록 만듭니다. 늘 위기상황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연재해는 개인이 그리고 정부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며, 그보다는 예상치 못한 순간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하나의 우연적인 천재天災입니다. 늘 겪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그 위력을 잘 알고, 지진의 발생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당연한 일상입니다. 지진에 의하여 크게 삶의 양식이나 행동에 변화가 생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和사상과 결합하여 조용하고 은혜를 주고받지 않는 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됩니다. 즉, 지진은 일본인들이 결속력을 더 강하게하고 갈등을 숨기며, 타자에 대하여 예절을 지키고, 정부가 하는 일에 관하여 지지를 보낸다. 뭐 이정도 생각이랄까요?
 

생명을 언제 어떻게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공포는 확신 없는 삶에서 특정한 믿음과 단합을 강요합니다. 그 믿음이 천황, 수많은 신들,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로 귀결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지진에 의하여 무엇인가가 변화하기보다는 지진이후의 복구나 지진후 처리과정에 더 중점을 맞추게 되었겠지요.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더욱 공고해진 결속력은 "이상지"씨가 말씀하신 지형적인 환경에서 유발된 조화로움과 결합되어 갈등이 없는 삶, 그러기 위한 특정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을 발견합니다. 정부에 불만이 있을 수 없고, 먹고 살만하니 특별히 혁명을 계획하는 토의나 모임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핵발전소 방사능 누출이라는 사고가 추가됩니다. 지금까지 정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던 지진이 이번에는 인간의 몫이 된 것이지요. 이부분에서 다른 사고의 확장이 있어야 할 것같은데 어렵군요. 우선 가설을 세우자면 1. 늘 화합을 중시하기 때문에 큰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다. 더욱 개인적인 삶에 몰두한다. 2.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의 몫이 된 사고에 의하여 정부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새로운 정당에 지지를 표명한다.(그리고 4.24 기초단체장 기초의원선거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참패합니다.) 지금까지는 두 번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군요. 하지만 단 가설은 가설일뿐....이라는 것.
 

너무 에둘러 말했네요. 정리하자면 일상이 되어버린 지진은 일본인을 지속적인 위기상태 속에서 살도록 만든다. 불안감은 당연하고, 천재天災이기 때문에 책임을 묻기위해 현정부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정부나 다른 집단에 불만을 표출하기 보다는 그 이후의 복구와 안정화에 집중한다. 여기서 和사상은 원인이며 결과가 된다.

하지만 심각한 위기를 초래해 온 대지진은 일본인들의 불안감과 위기감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간토대지진과 이번 대지진 이후 발생한 감정의 폭발은 조선족 대학살과 독도, 혹은 타민족에 대하여 불만을 표출한다. 지진이라는 위기상황 조성을 통하여 지켜왔던 정부의 구속력과 설득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는 폭발한 불만을 수습하기 위하여 외부에 적을 설정한다.
 

현재 일본정부는 지진이 아닌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위기인 인재人災에 봉착했다. 민중은 결속력이라는 지금까지의 반응이 아닌, 여당에 대하여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민주당이나 자민당이나 둘 다 우파계열이라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지방정당의 약진은 눈에 띄는 점이지만, 뭐 정말 무엇이 변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민당 민주당의 양당구도가 깨질까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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