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이 들끓는 공간이었다. 암막으로 둘러쌓인 네모난 공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실체였다. 블랙박스라 불리는 네모난 상자 안에 있던 단 하나의 생명체는 공기를 흔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손짓 하나, 공기를 울리는 허리의 튕김 그리고 공기는 빛을 머금은 새하얀 옷으로 명암을 달리했다. 하나의 생명체는 공간을 덮은 음악 속에서 강약을 달리했고, 몸을 떨었다. 그렇게 근육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근육 갈기가 다시 엉겨 붙기를 여러번, 비로소 네모난 공간은 생명으로 가득찼다.  


공연 내내 블랙박스라 불리는 어두운 공간 안의 빛은 기계에서 떨어지는 조명과 라이터의 불빛 둘 뿐이었다. Arnold는 적막한 무대에 올랐다. 은은한 조명 속에서 doucement(약하게)을 외치던 Arnold는 없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그는 doucement(약하게)을 끊임없이 외쳤다. 더 약하게, 더 약하게, 더, 더, 눈을 부시게 했던 밝은 빛이 Arnold의 형상을 어렴풋하게 남길때 즈음 그는 Stop이라고 외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공연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렴풋이 암흑이 일렁였다. 그리고 조명이 Arnold를 비췄다. 그믐달빛보다 약한 광도의 빛 속에서 Arnold는 꿈틀거렸다. 천천히 하지만 크게, 흑인 특유의 생명력이 부드러운 몸짓 속에서 울부짖었다. 부드러운 춤을 끝 마친 Arnold는 빛이 바랜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Arnold는 라이터의 기름을 태웠고, 수억만년 전부터 응축되어온 폐름기의 흔적은 가장 야생에 가까운 그의 손 안에서 타기 시작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인 순간부터 Arnold는 폐름기부터 억압된 분노를 폭발시키려는 하나의 가장 오래된 야수가 되었다.


약한 빛이 야수를 쫓았다. 손에 든 라이터에 불이 들어올 때 야수는 한 걸음 내딛었고, 라이터 불빛 너머로 조명기계는 빛을 밝혔다. 사각형의 빛과 동그라미 모양의 빛, 블랙박스의 모든 빛은 단 하나의 야수를 통해서만 의미를 얻었다. 야수의 걸음과 야수의 몸짓은 빛이 왜 그곳을 비추는지를 말해주었던 것이다. 야수는 멈추지 않았다. 


야수는 어둠 속에서 근육을 떨었고, 공기는 반응했다. 야수의 열기가 어두운 공간을 채웠고, 역설적으로 조명과 라이터의 빛은 뜨거움이 아니라 따사로웠다. 은혜의 빛줄기 속에서 야수는 온몸으로 작열하는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공연 링크(1:30부터 시작)

http://youtu.be/X4EYhoqZmy0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는 늘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으로 꼽는 것이 있다. 잡스가 그랬다지, 이명박이 그랬다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능력.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히는 능력이 그것일테다. 잡스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잡스는 종종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취합했다고 한다. 직원이 A라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게 왜 안되는지 조목조목 반박을 했다. 반박을 하는 것까지는 그런갑다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인간이 재정신이 아닌 것은 그 이후에 이어진다. 며칠 후 A 아이디어를 낸 직원에게 A 아이디어를 보여주며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왜 이 아이디어가 좋은지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처음에는 부정을 하고, 이후에는 긍정을 한다. 왜 구린지 조목조목 쏘아대고, 이후에는 자신의 아이디어인 마냥 왜 좋은지 조목조목 상대를 설득해댄다.

 

이미 A아이디어는 잡스의 것이다. 뭐 잡스가 상사이기 때문에 라는 말은 해봐야 뻔한 것이고, 잡스는 단지 타인의 말을 들을 뿐인 것이다. 남의 아이디어였던 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인가, 구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래위 성이다. 곧 구현된 이후에나 의미가 생길지도 모른다. 실상 창의력이란 재료의 종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데, 잡스에게는 이야기를 비롯한 모든 현상들이 창의적인 생산을 위한 재료였을지도 모른다. 결론을 짓자면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폐적인 성향, 즉 하나의 목적을 열망하여 다른 모든 가치를 후순위에 배치하는 능력이다. 열린 귀와 눈은 재료를 모을 뿐이고, 입은 설득을 시킬 뿐이다. 공고하며 단단한 그/그녀는 천착한다. 그 무엇인가에.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없다. 앞으로 간다. 비유를 하자면 목표까지 직진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함께한다. 함께 가는 사람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성공하는 사람을 쫓는 사람일 것이다. 쫓아가려면 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것은 성공하는 사람이 비인간적이라고 비하하는 글이다. 여기서 인간적이라 함은 일종의 공감능력을 말한다. 그들은 분명 비인간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내뿜는 빛은 타인을 매혹시킨다. 쫓고 싶게 만든다. 그들 개개인이 비인간적인 것과는 별개로 쫓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을 의지할 대상으로 택한 것이다. 뒤에서 개새끼라며 씨부렁거리는 것과 별개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쫓는 사람을 공감해주지 않는다. 대신 제시하고, 보여주고, 만들어낸다. 우리가 열망해 마지않던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며, 보여주고, 실현해내는 것이다. 단, 그 새로운 세계는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Posted by namit
TAG 성공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살이

걸 개 2013. 8. 11. 13:47

오늘이 가는 것도 두렵고, 내일이 오는 것도 무섭다. 그 다음 날이면 괜찮을까?라고 자문해 보지만 누구에게 묻고,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지도 알 수 없다. 실존을 인식함은 고통이라, 고통의 까닭은 나의 현재 좌표를 알 수 없기때문일테다. 책을 읽어 어디쯤 와있는지 궁구해보아봤자 이미 궤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다만 내 속을 파먹는 구더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 안의 구더기가 이만큼 커졌어. 더 크고나면 파리가 되겠지. 기생충에게 뇌를 파먹혀 밤마다 양의 아가리를 찾아 헤매는 일개미처럼, 하염없이 까닭모르고 거실을 배회하는 파리 한 마리. 오늘도 내일도 돌고 돌며 누군가가 전화번호부를 집어던지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럼에도 전화번호부의 무게가 겁나 생각없이 피하다가 습관적으로 날개를 접은 순간, 겉날개에 인간과 같은 붉은 피를 남길 것이 뻔하다. 그때에 나의 일부였던 파리의 좌표는 이미 구닥다리 썩은 인쇄지의 전화번호부 좌측 하단 어딘가로 확인될 터이다.
왜 이곳을 헤매고 있는지 그래서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그 질문에 선문답을 주고받던 이들은 인간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고, 좌표를 확인했기를 바랄 뿐이다. 파리의 실존은 까닭모를 8자를 그리며, 단지 8자를 무한히 반복함을 밝히고 만다. 이를 위해 파리는 한살이를 했다. 한살이는 한에 찬 살이일까, 하루의 살이일까. 사전에는 벌레의 탈피와 변태 과정의 한 주기라고 적혀있다. 나는 이 한살이라는 단어에서 한에 찬 삶이 떠오를 뿐이다. 내 속을 파먹는 구더기가 웬간히 성장해 축축한 날개를 말리고 날아간다면, 나는 신문을 접고 손에 집어든다. 파리가 앉기만을 기다리며 유심히 관찰할 것이다. 파리가 날개를 접은 순간 나는 신문지를 후려쳐 x월 x일 신문 하단 왼편에 붉은 반점과 부스러진 벌레조각을 찍고, 좌표를 확인해 줄 것이다. 파리를 살해한 신문지를 든 나는 인간의 하나가 되었다며, 마찬가지로 내 안에는 구더기가 원래 없었다며 눈을 흐릴지도 모른다.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별과 같은데

걸 개 2013. 2. 8. 16:34

우리는 별과 같은데 눈을 치켜떠 보기도 하고,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가 보기도 하며, 다른 별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허나 아무리 보려 해도 거대한 은하가 그리고 암흑이 분명한 이해를 늦춘다. 저 은하 너머의 그곳에 당신의 별이 있고 '나'의 별이 있다. 그곳에 대하여 별을 보는 마음으로 이야기해야겠다. 별과 같이 당신만의 시간이 당신만의 언어가 당신만의 세계가 있음을 알기에, 그렇기에 그 토양이 길러낸 심연이 당신의 안에 있음을 느낀다. 알 수 없다고 말 할 수 없지 않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이유로 말 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의 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사 인생에, 그래도 당신은 어떤 심연을 가지고 어떤 꿈을 꾸는지 듣고 싶다.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1113 신념부재.

걸 개 2012. 11. 13. 18:26

글쓰기를 많이 하고 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적어내려가다 보면 무언가 걸리적 거리는 껀덕지가 있다. '직관'이라는 경험을 통한 표상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달아 본다. 한 예술가는 감각자료가 축적되어 있는 중에 특정 경험을 하면 표상이 맺힌다고 했다.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난다, 미학자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아침에 읽은 책 혹은 드라마 영화의 이미지가 어떤 사람과 저녁 식사를 할 때 떠올라 결합하여 모호한 인상을 갖게 된다면, 이는 일종의 표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지만 불명확한 껀덕지에 걸리적 거리는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적는 족족 제출을 하는데 곧 평가로 이어진다. 흔히 이러한 평이 나온다. "글을 장악하지 못함, 저자의 미끄러짐, 불분명하고 논리적 건전성이 떨어지는 표현." 이러한 평을 받는 까닭은 분명히 내가 나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일련의 표상의 범람에 있다. 사고는 단어로 범주화되고 위계화되어야 나를 빠져나올 수 있다. 표상은 단어를 통해 나를 빠져나와 상대에게 나아가 닿았을 때 의미를 갖는데, 표상 간의 논리성은 내적으로만 정합적이기 일쑤다. (내적 정합성조차도 갖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지만 이것은 뺌.ㅋ) 그럼 변환을 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자료의 양을 세계의 사실과 동등한 수준에 맞추어 정합성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 부분은 늘 어렵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는 표상은 나아가 닿지 않으며, 내 머리 안에서 다른 감각자료와 짬뽕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표상을 일으킨 시발점조차도 잊는다.

 

우선 개인적인 논리를 세계에의 논리에 맞추고, 적합한 단어를 발견하는 것이 우선인데, 그러려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현재의 나는 "책을 읽어서 글솜씨가 늘어난다고 내게 어떤 도움이 생길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 우선은 그냥 하는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Nangbi 2012.11.13 2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개의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서 글솜씨를 늘리는건 단어의 양을 축적하는 부분이 80퍼센트이상일거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너의 글이 잘 안 읽히는 건 네가 단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개념적인 단어를 다듬지 않은채로 늘어놓기 때문은 아닌지. 어렵지만 잘쓰인 글은 한문장 끝까지 읽고 마침표에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데, 네 글을 읽을 땜 대개 문장 중간에 길을 잃는다. 난 ㅋㅋㅋ
    -지극히 개인적인 사소한 독자의 한마디

    • mater 2012.11.14 0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나치게 개념적인 단어를 다듬지 않은채로 늘어놓기 때문"

      공감

      이 짤막한 글에서마저도, 내적 정합성, 표상, 감각, 인상, 범람, 범주화, 위계화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들이 "범람"하고 있어요...

    • BlogIcon namit 2012.12.09 1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이 안읽히면 나도 잘 못 읽는 글인게 분명하고, 정체불명의 단어들이 범람하면 나한테도 그러한데, 정갈하게 다듬을 동기도 없고 힘도 없었소.ㅋㅋㅋㅋ이젠 뭐든 힘 내보려고.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