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05

걸 개 2012. 6. 5. 21:34

공부가 되지 않으면 도서관 산책에 나선다. 종이 냄새 풀풀 풍기는 책들 사이를 휘젓다보면 가끔 맞닥뜨리는 반가운 이름들이 있는데, 오늘은 왠지 장정일. 직접 다 읽어본 적도 없지만 워낙에 친숙한 이름이어서 책 세권을 몽땅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공부가 안되서 책을 읽는다."라 한편으로는 참 긍정적이지만 내가 들고 있는 나침반이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왜 책을 읽느냐고? 나는 내가 왜 책을 읽는지는 종종 까리하다. 와중에 장정일씨가 말하는 책을 읽어야 할 이유랄까.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적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장정일, 생각, p.167

 

얼마전에 읽었던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 이 떠올랐다. 우리는 왜 맹신하는가?에 대한 응답이었는데, 미국의 사회철학자인 호퍼는 공리부터 출발하는 엄밀한 논리구조를 세우지는 않지만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정합적인 가설을 세운다. 가난할수록 주체적인 자신감이 결여되어있다.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은 집단의 가치에 자기자신을 쏟아붓은 채 희생을 불사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집단의 가치에 투영한다. 집단의 가치 상승을 자신의 가치 상승과 동일하게 보면서 지속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관념적인 만족과 물질적인 급부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관념과 물질 사이의 이분법은 변화를 요구하는 시기가 왔을 때 극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관념적으로는 여전히 예측가능한 세상을 원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는지, 호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변화보다는 그대로 계속되어 예측불가능성을 최소화 하려는 열망은 변화를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기존 가치를 옹호하는 보수와 수구세력에 대한 긍정으로 향하게 한다. 결국 물질적인 빈곤을 관념적인 만족으로 극복한다. 물질적으로 가장 가난하지만 마음은 너희들과 마찬가지라는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의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은 이제 푸념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가 되어 내면화시킨 시를 읊는 화자의 다음 세대는 습관적으로 자기를 기만하며 자위한다. 모든 것을 버렸기에 가난한 자는 빈궁을 직시하지 않게 해줄 지금까지의 좋은 세상을 지켜줄 구관, 당신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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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05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mit 2012.06.14 0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태까지 하셨던 분들 뭐라고 해야하지 정치인들을 지칭하려고 했는데 대략 망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맹신자들 뭔지 안거야.ㅋㅋㅋㅋㅋㅋ

궤변론자 수정1

걸 개 2012. 5. 14. 19:22

얼마전에 읽었던 『헌법의 풍경』에서 저자인 김두식은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던 때에 한 교수의 수업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시험보는 기계를 양산하는 것과 다르게 실제 토론수업을 하고, 학생에게 윤리적,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수업 시간중에 지목된 학생은 주장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에 반박을 할 뿐이다. 마치 교수의 주장은 없고, 지목당한 학생의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해나가는 뿐인 듯 하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헤겔이 집대성한 변증법 즉 정과 반을 통해 합이라는 진보를 향한 도달과는 다르다. 변증술은 합을 향하여 나간다기보다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正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절대론적 윤리설이라고도 하는데,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윤리 규준을 인정한다.

 

절대론적 윤리설은 무너진지 오래지는 것은 물론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미국의 로스쿨 수업 풍경을 보면, 미국의 교수는 학생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운다. 학생은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가며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절대적인 옳음이 있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며, 그리고 하나의 사건에 개입하는 수 많은 관점과 관점을 유발하는 가치관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하나의 관점으로 사건을 보기보다는 학생보다 더 많은 상식을 가지고서 논박하는 교수의 태도 덕택이다.

 

궤변이란 논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말을 포장하는 것이다. 논리학에는 타당성과 건전성이 있는데, 타당성은 논리의 형식을 다루며 건전성은 논리의 내용적 적합성을 따진다. 궤변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있고, 건전하지 못한 이유는 내용의 측면에서 상식, 직관, 전문가, 경험 에 의하여 논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성적인 금기가 있고, 직관적으로 1+1=2 라는 정답이 있으며,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있는 것 같다. 더불어 경험적으로 아마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다. 논증하는 4가지 요소는 분명 현재에는 옳다고 인정되는 바이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시대에는 남색男色이 상식이었고, 어린시절에는 1+1= 창문 이 정답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전회가 있기 전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전문가의 주장이었으며 나침반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해가 뜨는 곳이 동쪽이지, 동쪽에서 해가 뜨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리적 건전성을 담지하는 4가지 요소는 경험주의의 귀납추리의 결과이다. 어느 논리적인 철학자도 절대적인 제1공리를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존재의 독립성과 인식의 출발점을 똑바로 세우지 못했다. (사견으로는 스피노자는 그래서 대단하기는 하다. 다 만든 느낌이라서-_-) 절대적인 상식, 직관, 경험, 전문가 에 의한 논증은 불가능하다.

 

궤변이란 건전하지 못한 주장이며, 논증이다. 하지만 위의 로스쿨 풍경에서 보았듯이 교수의 말은 전문가의 권위에 의하여 증명이 가능한 논거를 달기 때문에 적합성이 높은(그럴듯 해 보이는) 주장일 뿐이다. 사실인즉 궤변론자는 교수이고, 교수는 학생을 논리적으로 탄탄한 타당성을 갖춘 애기궤변론자로 만들고 있다.

 

"악법도 법인가?"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있으니 악법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일반적인 법치에 대한 착각은 법치를 법규로 보게 만들고 법규[각주:1]에 의한 사회를 정당화한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하며 대중에게 법규사회를 가르친다. 근대의 성과물인 홉스식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계약의 소산으로써 시민사회에 다다르게 되었고 사회가 만든 법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냥 법이니까 지키는 것이 상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문단은 이상한데 그럼 악법은 나쁜 것인데 선을 위해서 악법을 지켜야 한다와, 부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기에 법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숨겨진 전제가 두개 달린다. 국가가 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건 좋게 봐줘서 그런 것이지, 실제로 그런가? 그럼 이는 건전하지 못한 주장, 궤변인가??-_- (내가 적었지만 그냥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말인 것 같기고 하고, )

 

소피스트들을 보고서는 궤변론자라고 하며,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전해지는 "악법도 법이다."[각주:2]라는 또 다른 궤변을 강권하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틀을 갖추는 것이다. 곧 논리적으로 타당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소피스트적인 사고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고 있다.

 

  1. 법치와 법규는 엄연히 다른 의미인데, 스피노자가 한 말을 빌려 설명해 본다. "모든 것을 법률로 통제하려는 자는 악을 질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신장시킬 것이다." 법규란 법률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것이고, 법치란 법이 스스로 갖는 권위를 시민이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실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한다. 법규사회를 이끈 박정희식 윤리교육의 병폐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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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권고마 2012.05.15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극 공감. 아주 알찬 글이얌.

  2. 2012.05.17 2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BlogIcon 페이토 2012.05.20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대학들어와서 첫학기에 들었던 역사교양과목이 위에 설명한 미국 로스쿨, 딱 저 방식의 강의이었지ㅎㅎㅎ 학생들이 나가서 발제를 하면, 교수는 (우월한 사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무조건 반론만 펼치는... 학기 끝나고 지나고보니, 생각나는 역사적 사건?은 한개도 없었지만 역사(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운 수업이어서 지금도 참 기억에 많이 남는 강의 중 하나.

    그나저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 말하지 않았음. 권창은, 강정인 공저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참고!ㅋ

정의란 무엇인가?

걸 개 2012. 5. 6. 12:38

라고 제목을 단 마이클의 책이 나온 이후로 다시 한 번 정의는 정의롭지 않게 되었다.

고마가 일하는 미지북스에서 센델비판서적이 나오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정의라는 말은 매혹적이면서도 쉽사리 잡을 수 없는 장미와 같다.

누구라도 장미와 함께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매력적이게 되지만,

매력에 끌려 서투르게 쥔 한 손에는 핏방울이 흐르게 마련이다.

 

마이클이 적은 책의 마이클의 한 마디를 읽고 정의를 움켜쥐는 것은

장미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요크가家와 랭커스터가家의 혈투 마냥 

하나의 빛깔이 담긴 장미를 움켜쥐고 다른 색깔을 까대며 나와 너의 피를 흘리는 것과 뭐가 다를까.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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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글쓰기.

걸 개 2012. 5. 2. 11:49

한 글쓰기 수업에서 감당하지 못 할 비유를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다시금 글을 쓴다. 이렇게 표현했다. "비유에게 미안했다." "칼날이 나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 비유와 은유로 잔혹한 현실을 비껴볼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든다. 정말 비유가 문제였을까, 사실 비유는 문제가 아니였을런지도 모른다. 비유와 은유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비스무리한 시각과 시야, 그리고 시력을 바탕으로 힘을 갖게 마련이다.

 

그는 서둘렀다. 문장은 문장을 휘갈겼던 그를 앞서 나아갔고, 쓰여진 문장의 겉모습은 글 안에서 균형잡힌 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기보다 그의 습관을 드러냈다. 각 문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문자의 사용이었을 뿐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정합성보다 적당한 수준의 모순으로 스스로의 세계를 드러냈다. (모순과 정합성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가치판단은 배제한다.)

 

'내가 그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나를 그에게로 투영하는,'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역시나 비유와 은유를 이해시키고, 이해하는데에 가장 기초적으로 자리한다. 결국 비유와 은유는 글 안에 포섭되어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하며, 역량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아쉽게도 글은 단독적이며 개별적으로 완벽한 대상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 '우리'는 언어의 수인."이라고 말했듯이 글쓴이가 언어와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단독적이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디든 존재하고, 어디서든 독자와 글 사이에서 단 둘만의 결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쓴이가 의도하는 바가 설령 있었더라도 그렇게 읽힐 것인가는 기대 할 수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만큼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던가? 애를 놓은 기분이라고, 이제는 커가는 과정을 볼 뿐이라고. 결국 글쓴이는 스스로의 글을 지배할 수 없다.

 

그는 글을 세상에 내놓았고, 타자에게 읽혔다. 그의 육성이 자신의 글에 가감하는 해석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대를 벗어난 바람소리는 청자들의 귓가를 울렸고, 글과 독자가 갖는 둘만의 시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비유와 은유를 이해하기에는 공감의 능력이 결여되는 시간, 스스로의 내적정화를 위해 애쓰는 짧은 글쓰기는 공감이 없는 해석 속에서 난도질 당했다.

 

최소한의 공감에 대한 노력이 있었더라면 글쓴이였던 그에게 가학적인 문장을 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던진 순간 들려오고, 소화하는 순간 기억이 된다. 편린으로 남은 기억조차도 끊임없이 희구되며, 새로워진 기억이 생각과 행위를 더 나아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적은 글은 타자에 대한 인터뷰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국에 이르러서는 거울 속 인터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인터뷰가 되었다.

 

나의 글쓰기는 남에게 어떻게 읽힐까, 그가 와서 읽어 볼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이렇게 한번 적어본다.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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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권고마 2012.05.02 1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가 누구여 궁금하네

  2. BlogIcon bbyong 2012.05.11 14: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이 글의 내용보다도 니가 이렇게 글을 쓴 것 자체가 대단하다.
    아마 평생가도 너가 쓰는 것 같은 이런 글은 못 쓸 듯.
    나의 글쓰기는 배고플 때 배고프다고 내뱉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다이렉트하지.

    • BlogIcon namit 2012.05.12 00: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직접다가오는 그보다 좋은 것이 어딨나요ㅠ
      나는 절반이 허세고, 절반이 포장인 글인데..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욤.

    • ro 2012.05.14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가하면 저는 무한자아성찰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욤

선택.

걸 개 2012. 4. 16. 14:38

 

 

이성은 가능한 선택지를 추측하고 파악하는 능력일 따름이다.[각주:1] 선택은 감성[각주:2]의 역할이다.

호불호를 가늠하게 하는 감성의 역할이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고 행동을 만들어낸다.

경제학이 가진 대전제의 여파일까, 현대에 흔히들 말하는 합리적인 선택은 도구적 이성에 경도되어

실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하나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헤게모니, 관습, 독단으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인간에 목을 매기에 우리 각자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1. 분석하고 규정하는 능력정도라고 가정한다. [본문으로]
  2. 좋아함, 싫어함을 정하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자 [본문으로]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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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16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12.04.16 2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