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한국 역사책이랑 전설집이랑 민담이랑 뭐 이런 책들을 즐겨읽었는데, 난 중학교때까지 한국 전설 민담집 읽었다. 조금 쑥스럽기도 한데 이런 책 진짜 재밌어;;; 나름의 상상력과 꿈들은 이런 책들에서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적인 것이 뭐냐고? 배추도사 무도사가 나와서 옛날옛적에라며 옛날 이야기 해주고, 인간이 호랑이랑 도깨비랑 선녀랑 서로 골탕먹이고 장난치는 그런 것이 아닌감. 쨋든 지금 읽는 책들은 서구에서 온 것들이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라 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애국자인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야, 너가 문제야" 라고 하려는 것도 아닌데, 여태까지 내 삶의 절반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무도깨비랑 씨름하고, '곶감!'하면 호랑이가 도망가고, 선녀가 날개옷 입고 날아댕기고, 토끼랑 거북이가 경주하고 가끔은 용왕님도 나오고 산신령도 나왔다. 허나 이후의 절반은 걍 인간을 싫어하기만 하는 악마가 나오고, 제우스가 맘에 드는 여자 덮치고는 헤라가 시기할까봐 소로 둔갑시켜버리고(양이었나-_-), 천사가 날개를 퍼덕이고,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랑 경주하고, 가끔은 할배들이 둥글게 앉아서 '성배를' 찾겠다고 나선다. 문화와 전통이 없다는 것은 이런게 아닌가 싶다. 나와 나의 선조가 읽어왔던 기억과 연관성 없는 기억이 사념의 일반이 되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 더 이상 "한 사람의 노인이 죽는 것이 도서관 한 채가 불타는 것"이 아닌것, 그래서 한국적인 것이 뭐에요? 라는 질문에 당장 팔아먹을 수 있는 불고기, 김밥, 떡볶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효, 예절 이런 상대적인 가치, 규범만 떠오르는 그런 것. 다른 나라 들이대면서 뭐 떠오르냐고 물으면 외국인이어서든 어떻든 나도 먹는 것부터 떠오르겠지만서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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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mater 2012.08.25 1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한국적인 것은 케이팝? 이랍니다?ㅋㅋㅋ

    그리고 돼지 맞잖아 엄청 잘먹드만

    • BlogIcon namit 2012.08.25 1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 문화적 소양의 한계가 먹거리까지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BlogIcon namit 2012.08.25 1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맞다 나 잘먹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고마가 돼지라고 단 거였군..

증말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는 짓일 거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이 무지하게 발달해서 인터넷을 통해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싸이월드 그 외에도 이것 저것 많아졌다. 아마 내가 모르는 게 또 있을 거다. 은근 잠수를 타왔는데(잠수 탔다고 하기에는 남사스럽기도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잠수가 아닐까-_-) 사람들을 덜 만나면 덜 만날수록 인터넷을 통해 비춰지는 얼굴에 더욱 더 신경을 쓰는 느낌이다. 가시가 뾰족뾰족하고 못 생긴 글을 쓰면 내 얼굴은 어떨까? 하고서는 거울을 봤는데 뭐 준수하다. 얼굴 아래 붙어 있는 곳곳이 조금씩 처짐은 내 눈에만 보이니깐 건너 뛰겠다. 글은 건강하지 않을 수 있는데, 여기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거고, 불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비건강함이다. 그런데 내 진짜 얼굴이 건강한지 아닌지 비교 대상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간간이 적어서 남긴 것으로 내 얼굴에 흉터가 많은 것처럼 내 글의 흉터를 곱씹는다. 계속보니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버린다. 글을 지금의 내 얼굴인 것 마냥. 각설하고 누군가 보기에 이 글은 비건강해 보이는데 글을 낳은 내가 그게 내 책임이 아니야라고 강변하면 오성과 한음 이야기에서 권율이었나? 그 양반을 엿먹인 오성인가 한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새파랗게 어린 시키가 방 밖에서 권율(당시 판서대감 아니면 삼정승 중에 하나였을 거다.) 영감의 방 창호지에 펀치를 날려 불쑥 팔을 들이밀면서 "이 팔은 누구의 팔입니까? 왼팔도 오른팔도 저의 팔이 아니덥니까?"라더라. 니가 한 거는 니가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몸이 안좋으면 정신도 병든다, 정신이 병들어서 그런거다. 결국 건강하지 않은 몸에 건강하지 않은 정신이 담겨서 건강하지 않은 글이 출생하였다. 이런거.

 

어떤 가치가 파생되든 읽기나 쓰기는 다 좋은데 실은 머리 속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같다. 바다에서 파도가 치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나조차도 상상력의 바다에서는 다 할 수 있으니깐. 버터플라이, 개수영, 프리라이딩, 뭐 안되는 게 없다. 하물며 10m높이에서 다이빙 한 다음에 솟구쳐 15m를 날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내 잠수는 집이 아니고 내 머릿속이었을지도 모를런다. 위험한가? 위험하다. 경험이 밑바탕되지 않는 글쓰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뭐 흔해빠진 말이지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뭐해서 먹고 살래?라는 질문에도 꼬리가 말려 버린다.

 

이렇게 적고서는 마지막에는 또 이렇게 적어둔다. 읽는 사람은 역시 얘는 어쩔 수 없군이라는 생각이 들테다. 우리는 꿈을 꿔야지 건강하다고 여기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건강한 정신을 갖는다고 여기는데, 결국 Good-World를 신봉하는 거다.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신화는 공유되어야하는 일종의 규칙으로 남겨져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각주:1]가 보고 가면 개가 똥싸고 간다고 할 이야기지만, 그렇게 우리가 살아왔고 그나마 살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암. 어쨋든 여기서 같이 놀려면 이 세계가 구리지만은 않다고 여겨야 하는데 어찌보면 유토피아까지는 아니지만 디스토피아여서는 안되는 것이 이 세상. 그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다면 자연스럽게 규칙을 파괴하려는 놀이파괴자인 거다. 그렇다면 빠져나와야 하는데 디스토피아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유토피아를 꿈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잇힝. 마치 게임이 싫다고 게임을 때려치는 것보다 게임을 함께 하며 사기를 치는 사기게임꾼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것과 같지.[각주:2][각주:3] 내가 둘 중에 뭐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런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고, 이렇게 굳이 쓰잘데기 없는 다리를 달아서 글을 무겁게 만든다.


  1.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을 비롯한 저서에서 노예도덕(약자의 도덕)과 주인도덕을 언급한다. 내 설명보다는 읽어보는 것이 좋을듯.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99870&mobile&categoryId=1111# [본문으로]
  2. 호이징가는 그의 저작 <호모루덴스>에서 조심스럽게 문화 혹은 사회를 하나의 놀이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놀이의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대중으로 두고, 놀이파괴자(놀이의 규칙을 부정하는 사람)와 사기놀이꾼(놀이의 규칙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놀이파괴자를 중세 마녀사냥 때의 마녀로, 사기놀이꾼을 중세 마녀사냥 때의 성직자로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놀이파괴자를 스피노자나 칼뱅, 루소, 루터 같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더 쉽겠지만 이 양반들은 근대 초입이고 지나치게 특수하기 때문에 조금 무리수. [본문으로]
  3. 적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놀이파괴자는 기존의 규칙을 파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는 점을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마녀사냥의 마녀는 놀이파괴자로서 대상화되는 것이다. 엄밀한 개념으로 사용하였을 때 스피노자, 루터, 칼뱅, 루쏘등의 인물은 주체로서의 놀이파괴자라 말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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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24 0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mit 2012.08.24 1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지 같은 세상에 거지 같아도 죽지 않고 상고 있음 을 출발점으로 둘 수 없다고 니체가 떠들어서, 니체는 저렇게 개가 똥싸고 간다고 보더라 라고 적었던 거야.ㅋㅋㅋ저렇게 보며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더라, 라고 나는 적고 싶었던 것인데, 글을 쓰면서 내가 원하는 만큼 의미를 담지 못한듯.

20120816

걸 개 2012. 8. 16. 10:32

생각이 많아졌다. 많아졌다는 것은 무겁고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에게 해당한다. 머리로부터는 농도 짙은 썩은 물이 흘러내린다. 까끔하지 못해서 보기도 싫고 닦기도 싫었다. 이는 분명 내 게으름일테다. '지식'이란 악마의 열매 맛을 알아버린 나는 어느새 게으름이란 도구로 열매를 따먹고 있다. 도구도 열매도 썩고 물러서 언제라도 끊어지고 으깨질지 모른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각인된 유전자가 이어져 어버이부터 물려받은 몸뚱아리는 열매의 독을 중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악마의 열매를 '성숙'?'숙성'?이란 금빛으로 도금해버렸다. 겉보기에 좋았다. 그러다보니 "독毒이 치사량을 넘으면 차라리 많이 먹는 것이 좋"다며 "이왕 먹기 시작한 열매를 열심히 먹자"라 말했으면서도 실은 딴 생각을 머리 속에 품고 있다. "나는 아직도 악마의 열매를 먹지 않았어. 중독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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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Nangbi 2012.08.17 1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춤법 몇개만 고치면 좋아요를 누르고 싶군. 느낌있는 단편이야

연애는 결국 얼레리 꼴레리

 

문득 내 안의 괴물을 느꼈다. 나는 옆에 누운 그녀를 겁탈하고 겁탈하고 또 겁탈했다. 내 안의 괴물은 그녀 안의 괴물을 향하여 '우리'가 되자는 언어를 뱉어낸다. 우리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으나, 매캐한 향과 함께 우리는 깨져나간다. 한판의 놀이는 이렇게 끝났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명하던 시절에 순결캔디를 받았다. '순결'이라는 이음절의 단어의 명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가꾸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선생님은 설명했다. 물론 아이들이 선생님의 재미없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영국 교주의 정액과 피가 섞인 캔디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이 캔디를 먹고 나이가 들어서 섹스를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고 했다. 내가 사탕을 먹는지 안 먹는지는 선생님이 주의를 기울여 확인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미 순결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나와 친구들을 쑥덕거리기 시작했고, 자신의 말을 이어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탕에서 시작한 잡담은 어느새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고, 우리의 사고는 터진 봇물마냥 사방을 적셔나갔다. 섹스는 영화에나 나올 금발미녀들이 몸에 기름을 바른 채 헐벗고는 근육질의 헐크 호간들과 함께 어색한 자세를 하고서 등장하는 playboy 잡지에나 나오는 단어였고, 정액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단어였다. 우리가 그거였다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한 친구에게 멍청아라고 소리를 질렀을 뿐이다. 태초의 경험을 자극했던가? 라는 의문은 당시에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뿐이다. 그 단어들은 우리에게 선생님에게 들킬 수 없는 우리만의 금기어였을 뿐이다. 물론 착각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러한 요상한 단어들이었다. 덧붙이자면 피는 수가 뒤틀려 주먹질 하고 싸울 때 승부를 결정지어주는 코에서 나오는 승부의 척도였다.

'순결'은 재미가 없는 단어였다. 의미도 없었고, 의미를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캔디의 맛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다.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은 놀이였고, 놀이는 재미가 있어야 했다. 역시나 재미가 없는 선생님의 말보다는 주워들은 소문과 나름의 진지한 잡담이 재미였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소문, 누가 누군가와 둘이 있었다는 소문, 어른의 용어로는 연애의 초입이었을지 모를 누구랑 누구가 둘이 있었다는 얼레리 꼴레리.


발랄한 네온사인 아래로 사람들이 부대낀다. 골목길 사이로 침이 흥건한 담배가 바닥을 뒹굴고 터지는 리듬이 지하 어딘가로부터 몸을 울린다. 나는 조금이라도 리듬의 중심에 다가서고자 지하로 발을 옮겼다. 공간을 가득채운 사람들 사이로 나의 시선은 비집고 들어가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발은 느렸지만 눈동자는 빨랐고, 던져진 시선은 발이 가야할 곳을 인도한다. 구석에 자리한 바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들이 있었고, 클럽에 어울리는 화장은 볼을 볼륨감있게, 눈가를 검은빛으로 잡아늘여 커다란 눈이 시선을 흩뿌리게 돕고 있었다. anna lesko의 get it의 리듬이 폭발한다. 시선은 흩뿌려지지만 날카롭게 몸의 맵시와 얼굴의 윤곽을 훑었고, 시선이 교차할 때마다 인연의 붉은 끈은 엮이고 꼬인다. 비로소 몸은 바의 한 가운데에 이르렀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목소리는 음악에 묻혀 퍼지지 않았다. 음악이 만드는 분위기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에게 평등을 주고 있었다. 시선이 꽂히는 것은 가슴과 코와 입과 그와 그녀들이다. 당장에 부와 명예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옷을 입었는지, 성형을 했는지, 좋은 것을 많이 먹어 피부가 좋은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둘수도 없었다. 발광하는 조명이 옷과 피부에 반사되어 나올 때의 그 단색만이 시신경을 타고 뇌로 흘러들어왔다. 환각제와 같은 단색의 빛깔들은 그 장소의 모두가 끌림을 발산케 했다. 입고 있는 옷과 몸매와 화장은 빛과 어우러져 끌림을 이끌고, 끌림은 가늘지만 헤어질때까지 끊기지 않을 인연의 끈을 구성해나갔다.

'골목에 있던 침이 흥건한 담배가 뭐였더라?' 나의 끌림이 닿은 곳에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VIRGINIA SLIM(버지니야 슬림)이다. 미국의 한 담배업체가 여성을 위한 담배라고 광고하는 이 담배의 이름은 VIRGIN '순결'한 그녀를 상기시켰다. '순결'한 그녀는 연기를 내뿜어 그녀의 손가락을 감싼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향했고, 그에 닿아있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바라봤다. 인연의 끈일까? 나는 이 놀이의 목적이 떠올랐다. 붉은 끈이라나 어쩐다나? 인연의 끈은 이렇게 나를 '우리'에게로 모셔다 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 와서 닿았고 인연의 끈은 점점 짧아졌다. 시선에서 출발해, 이제 서로는 몸을 밀착시키기 시작한다. 끊이지 않는 춤은 종착점을 찾아가고, 그때는 음악의 박자가 바뀔 때 즈음이고, VIRGIN이라는 담배가 생을 다할 때이다.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때는 바로 그때다.


우리의 연애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끝난 적이 없고, 끝나지 않았지만 시작한 적이 없다. 많은 낭만주의 소설들은 역경을 딛고 도달하는 사랑을 이상적인 사랑이라 여겼고, 그렇기에 난관을 겪어낸 주인공들에게 사랑이라는 행복을 소유할 자격을 부여했다면, 그렇게 끝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은 책을 덮은 나의 상상력과 혼합되어 항구적인 로맨스를 남겨뒀다. 하지만 우리의 연애는 시작과 끝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이것은 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랑을 쫓지 않는 불나방들은 잉크통의 뚜껑을 따고 잉크를 흘려보낼 시간이라는 백지를 찾아 헤맸다. 등속운동을 하고 있는 우리는 같은 백지를 가지고 있었고, 잉크통의 뚜껑을 따는 순간 우리의 백지는 육성과 몸짓에 같은 빛깔로 물들었다. 우리의 연애에 남겨진 것은 흘러나온 땀과 매캐한 살 냄새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감각이 지워지면서 우리는 다시금 나로 돌아간다.


1968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반항처럼 지미 헨드릭스가 등장해 조롱 섞어 기타 연주를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누군가를 향해 소리 지르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우리는 할당된 시간을 흘려보냈다. 우리는 함께 누군가를 향해 야유를 보내지 못하며, '우리'를 지어 당시 히피들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분노를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우리를 갈구하지만 '너'는 '나'로부터 '나'는 '너'로부터 멀어졌다. 우리의 잡담은 클럽의 입구 골목길에서 클럽에서 그리고 둘이 남겨진 공간에 있었다. 그 공간을 나서며 남겨진 것은 또다시 '나'와 또 다른 나인 '너'이다.

주체가 없는 경험이라는 푸코의 말처럼, 87년 6월혁명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나'라는 주체를 꺼내들고 주체가 없는 경험만을 덧씌워 '나'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욕망한다. 공유된 우리의 경험은 알 수 없는 단어인 '우리'를 갈구하게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나의 쾌락, 나의 만족, 나의 자유는 우리를 찾아 헤매는 끝없는 걸음의 방식이다. 결코 다다를 수 없을 '우리'로의 열망은 잡담으로 끝난 순결캔디에 관한 진지한 고찰처럼 놀이로 귀결되어 버렸다. '우리'를 원하지만 '우리'를 알지 못해 다다를 수 없는 '나'는 여전히 정액과 순결과 섹스를 모르던 초등학교의 학생이다. 결국 '나'의 연애는 끝날 수 없는 '우리'의 유희 얼레리 꼴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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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mo 2012.08.05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2. BlogIcon mater 2012.08.07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약빨고 썼구만. 요사이 읽은거 중 최고다

  3. BlogIcon Nangbi 2012.08.17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써라 너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두자.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 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마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샤르트르, 말, 마지막.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라고 적혀있었다. 몇번을 따라 읽었다. 

샤르트르 역시 철학의 이론으로 무신론적 실존이니, 즉자니 대자니,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니 말하며 세상에 대해 설명을 하려했지만 한때 펄떡였던 죽은 생선같을 뿐이다. 살아서 펄떡이는 활어처럼 문학의 구절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안토니오 타부키는 "철학은 오직 진리에 관계된 것 같아 보이지만 환상을 말하고, 문학은 오직 환상에 관계된 것 같아보이지만 진리를 말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되새기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학문은 자신의 일방적인 어법으로 세상을 설명하려하지만, 예술은 자신의 어법을 통해 세상에 나서려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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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권고마 2012.07.09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아.. 아무렴..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