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보니 고동색 군복에 각반을 찬 일본 병사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 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 있는 자들이 함꼐 살아가는 세계라면,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라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계가 가짜일 때,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 있을 때,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구도 주인이 아닌, 노예만의 세상에서 폭력은 예술이다. 단 한 명이라도 죽어가는 노예가 있는 한, 세계를 바꾸기 위한 폭력은 불가피하다. 나는 폭력이 사라진 세계를 믿지 않게 됐다. 어느 세계에나 죽어가는 노예는 있을 테니까 어느 세계에서나 폭력은 예술이 될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란 없다. 유토피아란 폭력을 은혜하려는 자들의 거짓 관념에 불과하다. 오직 끝없는 투쟁만이, 오직 무자비한 폭력만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젊음이란, 그들이 프르른 나무 아래에서 꿈꾸던 세계란, 그 노란 군복 안에 감춰진 살처럼 여리다. 권총 한 발이면 그 살은 부드러움을 잃고 굳어간다. 그날, 내 곁을 지나가던 젊은 이국 군인들의 표정처럼.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살은 견고하고 딱딱한 세계를 지향한다. 인간의 살은 결국 폭력을 그리워하게 된다. 누구도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p.291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는 세계와 끊임없는 투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곧추 서있을 수 있는 거다.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는 강하지 않다. 이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책장을 훑었다. 한눈에 들어온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 이순신의 이야기였다. 이순신을 해전의 천재라고 한다면 내 책장에는 두명의 천재가 앉아있다.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 그리고 이순신. 실재했던 그들은 누구였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1년 10년 100년 1000년 실수로 1000년까지 올라갔다. 뭐 별거 있으랴, 이순신이고 모차르트고 지금 태어났다고, 10000년전에 태어났다고 그 고독을 이길 수는 없었을 거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되는 운명이 두려웟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김훈, 칼의 노래, p.239


실패, 충족되지 않는 사랑의 욕구, 자기 존재의 무의미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냥 포기해버렸고 그래서 죽었던 것이다 - 성공과 명성은 바로 다음 길코퉁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모든 게 실패처럼 보였을 것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p.100


마찬가지였고,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두려워했고, 고독했을 것이다. 홀로 있지 않음을 이해받으려는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이순신은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맸고, 모차르트는 죽음에 가까워진 순간 마침내 삶의 의욕을 포기했다. 내면의 욕망에서 비롯한 상실에의 두려움은 결국 고독과 불안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마르케스의 100년동안의 고독이 떠올랐다.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상징들이 지금의 내게는 특정한 의미를 지시한다. 가족은 나고, 나는 가족이다. 일족 중 누구도 일족 밖의 누군가를 만나서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독은 일족의 내적 결합으로  종착지를 찾고, 나인 가족은 결국 나 내부의 동력을 통해서만이 해소된다는 말이었을까. 그리고 그 해소는 일족의 소멸로 이어지지만..


헤르만 헤세의 홀로라는 시를 적어두고 싶다. 


세상에 

길은 수없이 많지만 

모두가 

목적지는 같다.


말을 타거나 차를 타고 달릴 수 있고

둘이서, 셋이서 달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걸음은 

혼자서 디뎌야 한다.


때문에 모든 고난을 

혼자 짊어지는 것보다

더 나은 지식도

능력도 없다.


그런데 살고 있고, 여 위에 인간들은 그래도 나름 다 유명한 양반들이었다. 그 죽일놈의 자기 인정 욕구라고, 나보다 똑똑한 이 양반들도 그랬으니 이정도 우울이야 별일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고, 비슷한 감정을 갖는다는 평등한 인간을 외치면서 다 고민하고 고독해지는 것이라고 잠시나마 위안해 봤지만, 어쩌냐. 내 감기가 남의 암보다 더 아픈걸.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외설이냐 예술이냐, 미친 교수,
윤기가 뚝뚝 떨어지는 빨간 메니큐어 바른 손톱,
손톱이 박힌 피부 틈으로 흐르는 더 빨간 피.
페티쉬나 가지고 있는 점잖지 못한 마광수씨의 시를 읽으면,
영감도, 할멈도, 부자도, 빈자도, 그 누구라도 손톱이 박힌 피부에서는 새빨간 피가 흐른다.
사랑이 고픈, 우리는 왜 서로를 구분하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할까.
개처럼 섹스하고 싶다.라는 마광수의 시가 떠오르지만 (제목이 이게 맞을 거다.-_-)
올리는 시는 다른 시. 출처는 貴骨

마광수, 사랑받지 못하여.

님이여, 저는 아주 키가 작은 나무이고 싶어요.

우리들은 모두 다 외로움의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들입니다.

나무들은 모두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어요.

그래서 대지와는 정반대방향인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키가 비슷하게 작은 나무들은, 서로의 가슴 위로 불어가는

크고 작은 바람들을 함께 알아요.

모두들 외로움에 깊게 지쳐 있기 때문에

나무들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키가 큰 나무들은 그 큰 키만큼

고적하고 외롭습니다.

하늘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서로가 마주보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나무가 적으니까요.

님이여, 그래서 저는 아주 작은 한낱 작목이고 싶어요.

키 큰 나무는 되고 싶지 않아요.

비록 아무 의미도 없이 쓰러져 땅 속에 묻혀버린다곤 해도,

저는 그저 외롭지 않게 한 세상을 살며

꿈꾸듯 서로 바라보며 
따사롭게 위안 받을 수 있는 

그런 많은 이웃들을 가지고 싶습니다.

Posted by namit
TAG 마광수,

댓글을 달아 주세요

평소에는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쉽사리 남기지 못한다. 생각의 꼬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고, 그만큼이나 질기고 긴 생각의 꼬리를 싹뚝 잘라내고서 무언가를 적어 남기는 것은 마치 '나'의 사고의 지평을 한정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이언 뱅크스의 『말벌공장』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한가지 무늬의 인상을 각인시켰다. 소설이 끊이지 않는 묘사와 서사 그리고 상징으로 독자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말벌공장에서 이언 뱅크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다. 사회적인 성性과 육체적인 성性, 그인 동시에 그녀인 주인공 프랭크는 무엇일까.

 

        - 이하는 스포일러가 강하고 개인적인 관점이 강하게 개입되어있기에, 책을 읽기전에는 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ㅋㅋㅋ

 

책의 말미에 이르러 문득 서양에 있었던 한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아쉽지만 사건의 전말만을 기억 할 뿐, 행위자의 이름이나 발생했던 장소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사건은 부모가 자식을 낳고 키우는데 남자아이에게 여자아이를 여자아이에게 남자아이가 되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아이가 남자아이였는지 여자아이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결과 아이는 성장하며 자신의 본래 sex와는 다르게 여겼고, 그러한 상태로 성장했다. 부모가 아이의 sex[각주:1]를 부정할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서양의 거대담론 중의 하나인 gender[각주:2]에 대한 믿음에 있다.

 

성역할이 사회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겼던 부모는 아이의 gender를 sex와 분리하였고, 사회화의 과정에 직접 개입한다. 아마뱅크스는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gender에 일침을 놓는다.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가부장제가 여성의 생물학적 출산능력을 통제하였다는 것인데, 따라서 생물학적인 성인 sex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말벌공장의 아빠는 gender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자녀의 성역할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당시 gender에 대한 논의가 만든 하나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재의 gender연구는 '사적 영역의 민주화'라는 기든스의 주장과 같이 사적 영역에서 스스로가 주권을 갖는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기치를 여성해방과 동일선상에 둔다.)

 

프랭크는 마지막에 남근선망과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사건의 원인을 sex를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그 시작점은 늘 여성의 임신가능성에 의한 모성애와 현실적인 측면이다. 뱅크스는 대담하게도 이러한 면을 여성성의 실체라 인정한다. 육체에 따른 본성을 부정당한 프랭크가 저지른 세건의 살인행위에서 더 나아가, 현재까지 남성으로서 살아온 자신을 죽이고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네번째 살인행위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일까? 는 생각할 거리로 남는다.

 

프랭크, 그가 아빠에게서 진실을 들을 때까지, 자신의 sex가 여성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하고 아빠의 바지를 벗기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상징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일은 패턴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 패텬에 대해 적어도 약간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강자는 자기 자신의 패턴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패턴에 영향을 끼치고, 약자에게는 이미 정해진 진로가 주어진다. 약하고, 운이 나쁘고, 어리석은 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p.179


내가 진화의 개념을 이해하고 역사와 농업에 관해 조금 배운 후에는, 내가 비웃던 멍청하고 흰 이 동물, 서로를 좆좆 따라다니고 덤불에 걸려 허우적대는 양들은, 수도 없이 많은 동물 세대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수백 수천 세대에 걸쳐 그것들을 키운 농부들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p.223


당시 에릭을 붕괴시켰던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하나의 약점이었고, 진짜 남자라면 결코 가지고 있을 기 없는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p.225

 

 


 


  1. 육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가르는 남과 여. (성기의 유무) [본문으로]
  2. 사회적으로 학습된 성性이며 여성주의가 나누는 중심담론이다. 푸코에 따르면 언제나 인간의 삶을 교차하고 있는 다양한 권력들 사이에 역사적으로자리잡아왔다. (성의 역사, 미셀푸코) 본문에서는 성역할을 나누는 것이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남과 여 사이에는 육체적 구분을 지양해야 한다는 급진적여성주의의 주장에서 나왔다. 진화론이 발전하면서 남과 여가 평등한 성향을 갖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일고 있지만, 그조차도 남근선망의 발현이라는 착각에 의한 생각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나는 모르겟다-_- [본문으로]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namit 2012.05.03 1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맞는 건가-_-

역사를 읽는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 곳곳에서 필독서로 꼽히며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설파한다. 왜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할까? 나의 짧은 생각에 사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역사를 보는 나의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 인생살이 속에서 관계정립과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너무 추상적인데, 사실 잘 모르겠어서.ㅋ).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없이 호기심에서 펼친 책은 실상 "역사는 뭐?"에 한정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유방법과 자세를 가르쳐 준다. 오랜만에 쾌감을 주는 책이었다.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원제:Re-thinking History)』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역사를 어떻게 봐야할까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책의 제목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뀌었는데 역자이신 최용찬씨의 이해가 돋보인다. 책의 제목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두는 역사 속에 살고 있고,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과연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키스 젠킨스는 응답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 아는 것이 역사란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고."

 

100년 후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남아 있다면 주류사학은 지금을 이렇게 적을 것이다. 아래서 다루겠지만 이는 '나'의 관점이 만들어 낸 '나' 해석이다.

 

대한민국 건국초의 정치상황은 남북대치상황에서 비롯한 독단적인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항하는 세력간의 갈등으로 인한 혼란기였으며, 남쪽에서는 일제의 권력을 친일세력들이 물려받아 세습의 성격을 띈 권력이 정부를 세웠다. 열강의 힘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한반도를 두고 소리없는 쟁탈전을 벌였으며 그 결과 한반도에는 두개의 정부가 수립된다. 그 덕택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분법적인 대립구도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아, 남북 각각의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은 수면 위로 부상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당시의 남한은 과두제의 성격을 지닌 후진적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였고, 북한은 일당 독재의 전제정치가 자리잡았다. 20세기와 21세기의 세계는 후기자본주의에 도달하여 실물경제로부터 독립적인 서비스 위주의 금융경제가 맹위를 떨친다. 북한은 스스로를 고립시켰으며, 남한의 정부는 재벌과 결탁하여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펴고 국민들의 후생복지보다는 '파이를 늘리는 방식인' 선성장 후분배라는 미명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 외에도 마르크스역사학자, 페미니즘역사학자, 민중사학자 그 외에 새로이 대두될 XX사학자들은 위와 같은 역사서술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큰 맥락에서 역사관의 근저에 엇비슷한 공통분모를 가질 것이며, 스스로의 세계관과 결합한 또 다른 역사서술을 해 나갈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역사가의 손으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쓰일 것이며, 저자가 말하듯 지금까지 '나'를 생산해 낸 시대가, 혹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하듯 '나를 저술한'(written me) 시대가 마찬가지로 우리를 저술해 왔고 이후에도 계속 우리를 저술해 나가게 될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서술하고 있으며, 서술하는 과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모든 증거는 사실 역사가의 취사선택일 뿐이다. 인식론적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fact도 발을 디디고 있는 세계를 무시하고서 관찰 할 수 없다. 과거를 본다고? 이미 지난 일이다. 우리는 떠올리고 생각하며 서술할 뿐이다. 상대성이론의 시간여행 역시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상대적으로 느리게 도착하는 것을 시간여행이라 말한다. 지난 일이 fact라고? 지난 일은 지난일이고, fact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다. 그럼 실제로 역사가 있을까? 책은 끊임없이 가르치려 든다. 과거가 있고, 역사는 과거를 서술한 결과물일 뿐이라고.

 

carr와 엘턴의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오직 '증거'라는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지 않는 길 외에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1)과거는 이미 발생했고, (2)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3)이 흔적들은 역사가가 다가와 발견하든 말든 상관없이 거기에 존재하고, (4)증거라는 용어는 어떤 흔적이 어떤 주장(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로' 이용될 때 쓸 수 있는 용어이지, 그 이전에는 사용될 수 없다.

p.144  

 

종래에 역사연구의 기본규격은 실증주의적인 역사관이었다. 실증주의[각주:1]라 함은 엘턴이 추구했듯이 역사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말이 없지만 실재하는 흔적을 들고서 증거로 제시하고, 그 증거가 다른 증거와의 관계속에서 구성하는 면을 파악하여 각주를 단다. 흔적은 실재했다는 증거가 되고, 각주는 증거가 하는 말이다. 증거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 실증주의의 목표이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주체가 절대적인 독립성을 갖출 수 없다는 사실은 '주체의 해체' 즉 포스트 모더니즘 정신이다. 개별주체가 절대적인 독립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아는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와 세계 안에서 규정된다. 편견없는 인간은 가능하지 않다. 편견이 없고 정합성을 담지하는 통계와 수학적인 결과조차도 절대적인 객관성있는 가정을 기본 전제에 두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전제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모래위의 성과 다를 바 없다. 실재하는 증거조차도 인간이 설명하고, 역사 서술은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다.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옛 애인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선물, 사진, 편지는 분명히 남아있지만 각자가 기억하고 상기하는 바는 다르다가 사실과 같지 않을까? 현재 애인과의 상태에 따라 각자는 편견을 갖게 마련이고, 이 편견을 깨부실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늘 객관적인 이면에 주관적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관습에 사로잡혀 객관적이라 여길 수도 있고, 미개한 외부인이 봤을 때는 주관적으이라 여길 수도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역사읽기로 들어선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진흙 발을 가진 인간으로 선다. 숙고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라지고, 분명하게 옳은 것도 그렇다고 분명하게 그른 것도 없어진다.

 

"'입장이 부여되지 않은 중심'은 언어적으로 모순이다."라고 저자는 밝힌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야할까?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중심을 잡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비단 역사를 볼 때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 늘 부딪힐 문제가 된다.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하며 스스로 답한다. "역사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나도 마찬가지다) 이미 해석 행위를 하엿다는 사실을 명백히 고백한 것이다. p.189"

 

글의 전반에서 하나의 진리와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실증주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어용학자라고들 한다. 연구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권력과 얼버무려진 하나의 (객관적이라 여겨지는) 상식을 요구한다. 상식이 없으면? 자연스레 몰상식이되고 이상한 놈, 미친 놈, 또라이, 병신이 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비판을 하고 기존의 방식이 그르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자기고백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까지도 비판해라, 그리고 생각해라.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교과서나 책에 나오는 단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일련의 '현재의 역사들'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동의할 수 있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상호 충돌하는 정당화 작업에 연루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같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이 반드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를 생산해 낸 시대가, 혹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하듯 '나를 저술한'(written me) 시대가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저술해 왔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분을 저술해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시대라고 규정하고, 역사의 본질을 다룬 '포스트모던세계의 역사연구'의 장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확실히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 세계에 살고 있다.                                      

p.36  

 

인식론(Epistemology: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episteme에서 유래)은 지식에 대한 이론들과 관계된 철학적 영역을 가리킨다. 이 영역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다른 담론이 철학의 일부분이며, 지식이라는 영역에 관한 한 '과거'에서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물음에 뛰어든다. 솔직히 이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인식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역사 속의 과거'같은 주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따라서 그러한 지식은 모두 가설이며, 실제로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 전제와 무게 아래에서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창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특정한 역사만이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생겨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은 각각 권력(power)과 관계를 맺게 된다.       

p.52

 

역사란 인식론, 방법론,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다. 인식론은, 실제 과거란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와 역사(서술)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은 존재론적인 것으로서 사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인식론적 노력으로도 메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역사의 본질에 다가가려 하지만 모두는 나름의 방법을 따르기 때문에 중심개념은 편파적인 구성물일 뿐이다. 어떤 역사도 사람과 계급과 집단에 의한 자서전적인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역사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지배적인 힘이 공공연한 권력이나 은밀한 개입을 통하여 통제할 뿐이다. 역사는 서술된 과거의 편린일 뿐이다.        

p.73

 

1. 진실은 역사담론 안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2. 객관적 역사란 실제로 존재하는가(객관적'사실'이란 실제로 존재하는가)? 만일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고작 해석에 불과한 것인가?

3. 편견은 무엇이며, 이를 버리고자 할 때 어떤 문제들이 파생하는가?

4. 감정이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로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며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가정이입을 위한 노력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5. 1차 자료와 2차 자료(흔적)의 차이, 그리고 '증거'와 '자료'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6. 개념쌍(원인과 결과, 연속과 변화, 유사성과 차이)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며 이 개념쌍을 사용할 경우 요구되는 임무는 완수할 수 있는가?

7. 역사는 예술인가, 과학인가?  

p.94


열린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란 내적 가치(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이다.. 그러한 시장에서는 사람들은 구매대상의 외관에 매혹되어 외부적 관계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찾는다. 결국 모든 우상은 (언젠가는 허물어져 내릴) 진흙 발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회의주의, 좀더 심하게 말해 허무주의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이고 근원적인 지적 전제들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p.176


  1. 실증주의 역사관의 전제는 "과거가 객관적으로 다시 창조 될 수 있다."이다. 실재하는 증거를 기반으로 편견과 속견없이 있는 그대로 과거의 흔적이 말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namit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2.04.22 16: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12.04.22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mit 2012.04.22 2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엄밀하게 이 개념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제 알아서 다행, 정리해줘서 감사.ㅋㅋㅋ

  3. 2012.04.23 09: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mit 2012.04.23 0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세력과 자유주의를 위시한 민족주의 세력의 대결구도를 말하는 거야?

      그런데 우선 다루려는 주제가 해방 직후가 아니고 건국 초이며, 건국초는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로 범주화 하려는 의도가 있었어. 해방 직후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를 포괄하려는 것이 의도였고, '나의 관점'에 따른 역사 해석을 짧게 하려고 했던 것인데 다시 읽어보니 너가 말한 부분은 맥락 중에서 해방 직후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만 보이네. 의도했던 것처럼 적지 못하고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긴듯.ㅋㅋㅋㅋ 아마 내 미숙한 단어사용이 그 부분을 부각시켰던 것 아닐까?

      그리고 정권이 각각의 세력을 대표했는지의 여부는 우선 차치합시다.
      해방 직후의 남쪽을 민족주의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북의 민족정신이 남측의 것과 대비될 만큼 부족했다는 말이 되는 거야? 그럼 해방 이후 휴전시기에 북한이 주체사상을 헌법에 기입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사회주의에서 민족주의로 넘어갔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아니면 소련 붕괴 이후로 볼 수 있는 건가? 궁금한데 책 읽기는 싫고 거참.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현대사 조금 깊이 들어가니깐 어렵습니다.


    • 2012.04.23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mit 2012.04.23 0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너 공부는 좀 했냐, 나 멘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간만에 졸랭 긴장돼.ㅋ

  4. 2012.04.23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BlogIcon 권고마 2012.08.13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째 다 비밀댓글이래.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5022385 이 책이랑 같이 읽으면 재밌겠는데. 나 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