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 간단 정리

책 장 2013. 2. 3. 13:40

기 드 모파상

 

생애

 

자연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기인 기 드 모파상(1850-1893)은 노르망디의 디에프 근처의 밀로메닐 성관에서 출생했다고 호적에 적혀 있으나 출생지에 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다. 12살 되던 때 양친이 별거에 들어가는 바람에 어머니, 동생 에르베와 함께 에트르타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1863년에 이브트의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퇴학, 소설가 플로베르를 스승으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세에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했으며 20세 때에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22세 때에 해군성에 취직을 하면서 파리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일요일마다 플로베르를 방문하며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았다. 플로베르를 통해 에밀 졸라 등 문인들과 교우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876년에 시 '물가'로 처음으로 시재를 인정받았으며 80년에 졸라가 주재하는 문집 <메당의 저녁>에 출세작 <비곗덩어리>를 발표했다. 안질 등 신경 계통의 병 때문에 알제리, 브루타뉴 등을 여행하는 틈틈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문명을 얻은 것은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1883)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래 최고의 명작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는 러시아 태생의 여류 화가 마리 바시키르체프 등 연인을 여럿 두었으며, 장편 <벨 아미>의 성공으로 요트를 사서 '벨 아미'라고 명명한 후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다작으로 인해 안질과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장편 <죽음처럼 강하다> 등 히트작을 발표했으나 갑작스런 발작으로 친구들을 놀리곤 했다. 42세 되던 해 페이퍼 나이프를 이용, 자살을 기도해 파시의 정신 병원에 수용됐으며, 다음 해에 병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작품

 

모파상의 전 작품은 그의 세계관 내지 인생관을 반영한다. 초기의 통렬한 풍자, 다음에는 감상과 연민, 최후에는 개인적인 불안과 공포, 그리고 처음부터 그의 작품에 흐르는 구원 없는 회의주의이다. 모파상의 문학은 결정론적인 인간관에서 오는 짙은 염세주의의 근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여자의 일생> : 모파상의 처녀작(장편)으로 1883년 작이다. 여주인공 잔은 냉혹한 남편에게 버림받고 이어 자식에게도 배신당한다. 그녀와 나란히 늙어가는 하녀 로잘리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로군요." 여주인공 잔의 암담한 회색으로 물든 길은 결국 근대 생활에 대한 가혹한 판결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증오하고 조소할 만한 진실 이외에 동정할 만한 진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정확하게 시대를 설정한 풍속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이야기 첫머리에 1819년이라는 시대가 명시되고, 잔과 쥘리앵이 신혼 여행을 위해 코르시카로 건너갈 때에는 증기선이 다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후 잔이 아들을 찾아 파로 나갈 때는 "6년 전부터 화제가 되어 있던 철도가 파리와 르 아브르 사이를 왕래하고있었다.

모파상은 인간 마음의 날카로운 탐구자였다. 직접적인 심리묘사를 피하더라도 인간의 세계가 감추고 있는 뜻밖의 진실, 특히 행위를 통해 표출되며 인간 감정을 초월하는 환멸적 작용의 탐구에 몰두하는 태도가 이 작품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하녀 로잘리가 하는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지당하다 하더라도, 잔은 이 말로 치료받을 수 없는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고, 인생에 대해 옳고 그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만큼 타격을 받고 있었다.

 

<벨 아미> : 자신의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뻔뻔스러운 성격을 이용하여 언론계(신문)에서 성공하는 협잡꾼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뒤루아가 관계하는 <라 비 프랑세즈>지는 유태인 사장 왈테르를 중심으로 하는 악덕 정치가들의 모리를 위해서 이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파상은 패정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평론을 생략하고 있다. 반면에 모파상은 <벨 아미>에서 종래 자연파에 의해 경시되었던 심리 연구를 도입한다. 그리고 벨 아미의 냉혹한 이기주의와 동물적인 욕정에 넘치는 파리 사교계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모파상의 장편 중에서 가장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회 소설의 색채가 짙다. <여자의 일생> 이상으로 소설 세계가 확대되어 무대가 노르망디에서 파리로 옮겨진다. 특히 <벨 아미>에서는 작자의 염세적인 인생관과 사물을 관찰하는 예리한 '작가의 시각'이 전편에 번뜩이며, 당시 프랑스 사회의 추악상과 권세욕에 들뜬 인간형의 표본인 주인공 뒤루아의 성격 및 행적의 추적, 문란한 사회 풍속도가 있는 그대로 담겨있다.

 

<죽음처럼 강하다> : 이루지 못할 사랑,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 그것을 잘 알면서도 숙명적으로 그 사랑을 버릴 수 없어 자살을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살했다고 해서 그 사랑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죽음의 길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삶을 택한 주인공 올리비에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적인 심리 소설로서, 예술가를 장식물로 환영하는 파리 사교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화가 베르탱의 슬픔은 두말할나위없는 모파상 자신의 피로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초기 작품에서 보여준 냉철한 태도를 다소 잃고 신경 과로와 질병에서 오는 초조감을 보이고 있으며, 작품 속에 보다 자기의 주관을 주입시키고 있다. 고뇌하다가 자살하는 올리비에의 모습은 흡사 모파상 자신의 말년의 모습이기도 하다.

 

생애문학론

 

모파상은 소시민의 생활 주변과 일상, 사회의 병폐를 가차없이 폭로하고 야유하는 것만이 "인간의 상태를 일체의 편견 없이 충실히 묘사하는 소설가의 임무"라고 주창한 졸라의 이론을 문학에서 극대화했다. 모파상은 졸라의 친구로서 자연주의의 전성기에 문단에 등장했지만, 문학사적으로 본다면 졸라보다는 플로베르의 후계자다. 졸라를 중심으로 한 문학 서클인 '메당의 무리'가 제각기 모아서 낸 단편집 <메당의 밤>에 발표된 <비곗덩어리>는 단편 작가로서 그의 위치를 결정해주었다. 스승 플로베르는 이 작품에 대해, 구상이 독창적이고 배경이나 인물도 실감이 나며 심리 묘사도 적확하고 문장도 나무랄 데 없다고 절찬을 했다.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란?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사실주의)은 그 철학적 기반이 같아서 그 둘을 분명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둘을 구분하는 점들이 분명히 있다.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는 모두 실증주의적 정신과 방법에 따라 사물을 객관화시키고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 가운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엄하게 관찰하여 사실과 진실을 기록한다. 와중에 '자연주의' '자연과학적인 방법'이나 '실험적인 방법'을 강조하여 문학의 방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리얼리즘과 구분되는 점이다.

  자연주의는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인간의 삶을 환경이나 유전의 작용에 의한 결과로 파악함으로써 문학을 '환경, 유전 결정론'에 빠뜨렸으며 인간을 생명이 없는 무감각한 사물의 수준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다. 기계적 결정론이라는 것이다. 자연주의 문학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회, 제도 사이의 관계성과 상호작용을 무시한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배제하고 인간의 본절적인 특성을 제거하여 사람을 비인간적인 동물적인 것으로 한정한다는 비판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결단하고 노력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기계적으로 지배당한다고 해석함으로써 결정론적 세계관에 빠지는 점 역시 비판 받았다.

  졸라는 리얼리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연주의를 주장하는데 그의 자연주의와 발자크의 리얼리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차이는 경험과 실험의 방법적인 부분에 있다. 경험은 체험과 관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며, 실험은 거기에 덧붙여 적극적으로 어떤 목표를 세우거나 어떤 가정을 설정해 놓고 해부와 분석에 읳 그 가정의 진위를 가리고자 한다.

 발자크가 제1제정과 왕정보고 시대의 프랑스 사회를 냉철한 관찰과 객관성에 입각하여 묘사했다면, 졸라는 제2제정 시대의 사회 전반을 자연주의적 수법에 따라 과학적, 실증적으로 파헤친다. 졸라는 인간 군상의 어둡고 음습한 부분까지도 여과 없이 세밀하게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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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책 장 2012. 11. 5. 16:44

매일 같은 코스다. 블로그에 무언가를 적고 앉아있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다. 적고싶으니까 이런게 아니라 과제같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다 보면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상념들을 낚아채서 남겨놓고 싶은 욕구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보는데 이번에는 『장미의 이름』움베르트 에코의 작품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백 마디 하는 것보다 한 번 읽는 것이 낫기 때문에 적지 않겠다. 라고 적어두지만 실은 뭔 이야기인지 다 알아먹을 수가 없다. 읽다보면 마치 내가 그 시대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도원을 상상하게 되고, 수도원의 도서관에 있는 책이 궁금할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시의 생각들과 인간에 대한 통찰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약초 이름부터 별 것들이 다 나오는데, 이루 다 나열할 수가 없다. 당시 교황과 황제의 대립에서 시작해 첨예한 논쟁거리였던 사제의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먹었던 음식은 물론이고 유명한 인물들과 수도원의 내부 장식을 묘사하는 장면도 있다. 더불어 비밀에 쌓인 도서관에 꽂혀있는 서책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데, 이 부분이 아주 가관이다. 시각視覺에 관한 이야기, 신에 관한 이야기, 약초, 선善, 광학기술 그 외에도 고시의 한 부분 성인들의 행적이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뿐만 아니라 섹스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부분이 조금 의아하다. 왠 수도원에 섹스?라고 하겠지만 읽어보면 안다. 그러하다. 거기까지 읽어내려가는 데에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읽어보려고 맘 먹었으면 끝까지 가봐야지, 그래도 다행인 것이 섹스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지는 않는다.

 

기억에 남아있는 파편들만 나열해 봤는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궁극적으로 이 책은 추리물이다. 추리물은 추리물인데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넘치는 개성이 문제라면 문제. 거기다가 에코라는 사람이 혼자 적었지만 그 내용은 수많은 기호를 나타내는 기호들의 총체인 서적을 기반으로 한지라, 주인공들이 여간 박식하지가 않다. 더불어 익숙하지 않은 서양 중세의 학자들 이름은 읽는 나를 움츠리게 하지만, 그런 부분은 가뿐하게 패쓰해줘도 좋다.

 

이렇게만 적어두면 누구나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본 책을 추리물 정도로 격하한다고 욕 먹을까봐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간단하게나마 남겨보려 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善)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 사랑일 수 있는 법이다.」

「베노 수도사는 이제 제 손에 들어온 서책의 선을 지킨답시고 그 책을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부터 지킬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데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로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름 없다.」

p.736

 

이렇게 남겨진 부분이 책에 관한 이야기인데,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수도사는 영국의 오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오컴이라 할 것 같으면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해진 양반이다. 후에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사용하는데,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무거운 지방덩어리를 다 잘라내 버리면 본질만이 남는다는 그런 이야기. 오컴의 면도날은 이 뿐만 아니라 흄도 사용한다. 흄은 그래서 결국에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라며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라 칭해지기도 하는 인물이다. 즉 귀납을 강조하는 입장인데 이쪽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 경험을 중시하는 계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면 이런 저런 자료들을 취합하여 정리하면 어떤 목적이 있다며, telos(목적인)을 최고의 원인으로 둔다. 언젠가 들어봤을지도 모르지만 4원인 이라고 해서 형상인, 질료인, 목적인, 운동인 이 있다. 4원인은 워낙에 인터넷에 잘 설명되어 있어서 나는 패스하겠다. (클릭하면 4원인 뜬다.) 그런데 뚝 잘라온 저기에 책과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선은 목적인이라는 생각. 경험주의적인 생각, 나도 너무나 공감하는 생각.

 

인간도 그러한가? populus라는 말이 로마시대에 있었듯 정치에 참여함만이 진정한 선이라고 생각했던 당시를 넘어서 지금은 조금 다르다. 생각하기 힘들어서 다음에 이어 적어야겠다.

 

+그러면서 공개로 적는 까닭은 비공개로 하면 다시는 안 볼 것 같아서-_-

 

Posted by na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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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준은 말한다.


“정권을 잡고 처음에 청와대에 들어가면 기분이 구름 위를 떠다닌다. 마치 약을 한 듯한 상태가 된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에서 측근들을 각 처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정책을 일임한다. 장관들이 업무지시를 한다. 그럴 때에 관료들은 그 정책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견을 제시해봐야 반개혁세력으로 지탄받을 뿐이므로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한다. 몇 개월이 지나면 부작용이 생긴다. 장관이 입장을 바꾼다. 이런 식으로 두 번만 실패를 하면 장관은 풀이 죽는다. 이때를 노려 관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안을 장관에게 가져간다. 그러면 이번에는 장관이 관료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 이런 식으로 정권은 관료에게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관료들에게 포획되다 보면 원래의 로드맵은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은 로드맵을 줄 곳이 없다. 그때부터 기업보고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측근들이나 학자들 그룹이 만들어 준 것에 비해 훨씬 전문성있고 그럴듯 해보인다. 이젠 정권의 로드맵이 기업보고서에 잡아먹힌다. 하지만 기업보고서는 어쨌든 일개 사기업의 이윤을 위한 것이다."


최근 정치에 대하여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찾아보게된 윤여준이라는 사람, 그제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다.(정치에 대한 내 무지.ㅋ) 처음 들어보는 매체의 기사였지만 굉장히 흥미롭다. 그의 이야기가 지난 정권 지도부들의 실정과 결부되어 하나의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인듯, 의미심장한 이야기여서 긁어 옴.


전문은,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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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애 2012.09.28 1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미디어스 알아 ㅋㅋㅋ
    반삼송파인듯 맨날 ㅇㅍ 기사 좋게 나옴 ㅋㅋㅋ

  2. 2012.10.18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mit 2012.10.14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 말이 맞아.ㅋㅋㅋ 결국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삶과 구분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데, 그냥 쉽게 적어뒀어.
      뭣보다 정치적 글쓰기를 하지 못하는 이유(정치적글쓰기가 주장하는 글이라는 생각.)는 내 정체성이 굉장히 모호해서.....주장이 불가함ㅋㅋㅋㅋㅋ근데 왜 비공개로 적냐.ㅋㅋㅋㅋ

  3. 2012.10.18 2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가끔은 참을 수 없는 전달의 욕구에 손가락이 흔들흔들, 아마 좋은 것은 나눠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가.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에는 단편적인 소재에 관하여 직관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재미있다는 아니지만 지적인 경이로움에 대한 경탄의 즐거움을 주는 책이랄까. 하지만 이 글 난해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뻔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읽는 이의 생각의 양은 읽는 이의 숫자만큼 많다.


             공사현장

              

아이들에게 맞는 대상 - 시청각 교재, 장난감 혹은 책 - 을 만드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골머리를 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계몽주의 이래로 그것은 교육학자들의 가장 케케묵은 생각 중 하나다. 심리학에 매료된 나머지 그들은 이 땅이 아이들의 주의력과 연습을 위한 비할 바 없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아주 특수한 대상들이다. 특이하게도 아이들에게는 뭔가를 만드는 작업장을 찾아가는 성향이 있다.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린다. 바로 이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사물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작은 세계의 규범들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그 작은 세계의 소도구와 연장을 동원하여 우리 혼자 힘으로 아이들에게 도달할 길을 찾을 생각이 아니라면.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p.81


그리고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의 절정은 뭐니뭐니해도 이부분이 아닐까 "이걸 봐 덴마, 내안의 괴물이 점점 커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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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을 어떻게 관찰해야 하며, 이해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이다. 사실 번역이 탁월하다 할 수 없다.  흐름이 뚝뚝 끊긴다. 하지만 번역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물리학, 철학, 심리학, 언어학적 소양이 부족한 내가 부드럽게 읽어낼리가 만무하다. 비유와 은유의 수사는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우리의 소화력을 높이려는 시도정도로 여기면 되겠다. 이 책에 관하여 간략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이해했다고 말 할 것인가?"에 대한 긴 글이다. 열과 성을 다한 리뷰를 남기려는 시도는 미답에 붙여두고, 쉽게 이해가 가능했던 한 부분을 발췌하려 한다. 유럽의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와 미국의 실증주의 물리학자와의 대화다.

 

'메타'라는 접두어는 그 다음에 오는 개념을 문제삼는다는 뜻, 즉 해당되는 영역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물리학이라는 영역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해 보지요. 즉 '전문가'란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전문가란 그가 관계하는 분야에 대해 매우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정의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한 사람이 한 분야에 관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알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전문가란 그가 전문으로 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벙할 수 있는 가장 큼직한 몇몇의 오류를 알고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필립 프랑크를 형이상학 전문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가 확힐히 형이상학에서 가장 큼직한 오류를 피할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찬가를 프랑크가 좋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말을 풍자적으로가 아니라 아주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그와 같은 토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점은 진리가 숨어 있는 심연을 단순히 제외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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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mater 2012.08.25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장에 있는데 들쳐보지도 않은 책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