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 엔도 슈사쿠.

책 장 2010. 1. 17. 16:58

"너는 그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너 때문에 저사람들이 죽어간단 말이다."
                                                                                                      p.212

밟아도 좋다. 네 발의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p.267

증오의 감정과 모멸의 감정을 저쪽도 이쪽도 서로 안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페레이라를 증오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남자의 유혹에 의해 배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페레이라 속에서 자신의 싶은 상처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는 사실이 견딜 수 없듯이, 눈앞에 앉아있는 페레이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옷을 입고 일본말을 사용하고 자신과 똑같이 교회에서 추방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p.276

기지치로의 울먹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그 성화 위에 나도 발을 놓았다.........이 격렬한 기쁨의 감정을 기치지로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강한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약한 자보다 강한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신부는 문 쪽을 향해 빨리 말했다.

좋다는 소문을 워낙 들어놔서 도서관 온김에 읽었다. 뭐 전체적인 스토리는 한 신부가 일본에 선교를 위해 도착하고, 그가 존경했지만 이미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며, 그 역시도 굉장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결국에는 행위적인 배교를 하게 된다는 이런 두리뭉실한 나의 스토리 소개이지만, 실제 책 낱장낱장에는 배교하게 되는 신부의 고민과 갈등이 너무나 공감을 이끌어 내도록 적힌 소설이더라.

어쨋든 다 읽고 나니 엔도슈사쿠라는 작가가 인정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굉장히 민감한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무신론자도 아닌 신부가 고민하지만 고민이 발생하는 그 상황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동시에 신부가 배교행위를 하는 장면에서의 심리상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 역시 그의 갈등을 함께하게 된다. 어찌보면 작가는 글의 처음부터 말미까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주제로 고민하는 신부의 모습과, 자기방어를 위해서는 처음에 실행한 배신 이상의 행위를 해야하는 배신자의 논리를 부각시킨다. 책은 갈등과 고민에 휩싸인 신부의 행동 생각 하나하나를 다 집중해 바라본다.

다 읽은 후 신부의 내적 갈등의 표현법과 그러한 갈등을 유발하는 신부를 둘러싼 상황설정, 마지막에 등장하는 신부와 유다의 일치화는 진짜 최고인듯. 그리고 굳은 심지던 약한 심지던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더 깊게 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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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본다."라는 의미에는 아마 책의 내용을 읽는 것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소개를 듣고, 책의 겉표지를 보고, 책의 삽화를 감상하며 그 책을 들고다니는 행위와 책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까지이다. 2번책을 다 못 읽어서 3번 책은 꼭 읽고 말겠다는 의지로 도전한 "아파트공화국" 저자는 지리학을 연구하는 프랑스 여성이다. 그리고 제목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아파트의 공화국이다.

어쨋든 서론 다 짜르고 한마디 하려다 보니 책 표지에 4-5포인트 정도의 크기로 적혀있다. "세상은 당신이 사는 곳을 동경합니다.", "이웃도 자부심입니다.", "집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인생의 특별한 날에 어울리는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모두다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채워져 있다. 그리고 아파트를 설명하는 어떤 문장도 어색하지가 않다.

우선 프랑스는 빠리에 고도제한을 두는 노력을 하며 높은 고층빌당을 거부한다. 그 결과 도시는 5층이하의 낮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건물들로 외관을 꾸미게 되었다. (물론 신시가지라 하여 고층 빌딩으로 이루어진 상업지구가 과거 빠리 외곽지역에 건설되었다. 우리나라로보면 여의도만큼도 안되는 크기였던듯 싶다.) 작가는 이러한 나라에서 삶을 살아온 비한국적인 사람의 눈으로 우리의 아파트를 바라본다. 아니 어찌보면 콘크리트 건물의 숲을 바라본다.

문장들로 구성된 책의 표지를 구성한 인물이 쥴레조인지 아니면 출판사측인지 여부는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책의 표지를 누가 선택을 하였건 간에 표지를 구성하는 문장들을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주체는 명확하다. 그 주체는 광고 혹은 선전이라는 여론을 선도하는 그리고 무의식중에 사회 일반에 영향을 끼치는 언론매체이다. 문장들은 사회 일반에서 광고방송을 통하여 개인들에게 전파된다. 그리고 접촉 된 광고들은 사회구성원들이 가치판단의 고려 없이 수용하게 만드는 마치 어렸을적 엄마, 혹은 아빠의 말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쉽지만 엄마 아빠의 한마디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은 명확하지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재미가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단 한 발자욱만 뒤에서 바라보도록 하자.

일단 티비 혹은 신문에서 나오는 광고의 모습들을 떠올리면 연달아 생각의 가지가 치고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점이 존재함은 명확하다. 광고에서 최고 상종가를 치는 모델들의 등장과 마치 유럽의 Castle을 연상시키는 광고에서 더이상 아파트는 차디찬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다. 따듯한 "즐거운 나의 집"이 되는 동시에 명품을 입고 소비하며 값비싸 차를 모는 "나"의 가치와 오버랩된다. 사고의 근저에서 아파트는 이미 우리가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버린 상품의 의미를 갖게 된다.

집의 개념은 "즐거운 나의 집"이지만 그 즐거움은 과거의 합께하는 삶과는 큰 거리를 갖는다. 쥴레죠의 말에서와 같이 집은 더 이상 소통과 가족의 협동성 그리고 서로 도와가는 삶과는 거리감을 갖는다. 집은 들어올 때부터 무인 인식시스템에 근거하여 들어 올수 있는 존재와 들어 올수 없는 존재를 나누기 시작한다. Castle이라는 단어는 유럽의 고풍스럽고 서양적인 이미지로 한정되지 않는다. Castle은 말그대로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그리고 거주민과 비거주민을 분별하여 수용하는 계급적인 차별의 공간이 된다.

책의 중간중간에 프랑스의 banlieu(한:도시 외곽의 영세민 거주지역 정도)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다. 그 공간의 거주민들은 서류상으로는 공화국의 국민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거주민 자신들이 느끼는 정체성은 banlieu의 거주민일 뿐이다. 몇번의 소요사태 혹은 사회에 관한 반항에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공화국(프랑스)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100%수용하지 않는 프랑스 국가에서도 그들을 거주민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특히 서울에서의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인 사안이 바로 "즐거운 나의 집"이다. 이 공간은 세습되며 더 좋은 거주지를 열망하는 한국의 중상류층이상의 계급에서는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유목민의 습성을 되살아난다. 유목민의 자유로움은 강조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더 좋은 장소만을 찾아가려는 무책임함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유목의 과정에서 남는 흔적은 직간접적인 더 낮은 계층의 피해뿐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문명이 자연을 휩쓸고 지나가듯이 어떠한 자연스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쫓아 온 중산층 혹은 영세민의 빚과 흔적만이 존재할 뿐이다.

프랑스의 banlieu가 영세민을 수용하는 사회에서의 쉽게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수용하는 공간이라면 한국의 castle로 대표되는 중상류층 이상의 공간은 떨똥이 아닌 너무나 잘 적응한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사회 주류들을 위한 공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만을 위한 공간이다. 높은 건물에서 주변을 바라보며 그들이 모셔져 있는 공간에는 오만가지의 편의 시설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소통의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편의시설의 종업원들은 과거의 하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새로운 계급의 공간, 유럽에서는 중세에만 존재하였던 성의 귀족과 성밖의 일반민들의 관계가 한국에서는 현시대에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는가? 땅이 좁기 때문에 아파트를 권장한 정부? 더 좋은 집을 열망하는 중상류층?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때리는 건설회사? 혹은 광고회사? 쥴레죠는 말한다. 집이 더이상 거주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투자의 개념이 되면서 그리고 아파트가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는 한국민들의 서양적인 현대적인 이미지에 대한 투영이 일어 났을 때가 시작이라고.

-뭔가 대략 써두고 보니깐 이건 뭐 불평 불만만 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초딩 때쟁이가 떠오르는 것은 뭔가-_- 쥴레조가 castle이라는 체제가 완벽히 자리잡은 현시대에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아파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얻게 해주는 책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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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여, 자본가가 돼라.
여가라고 알려져 있는 비노동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 사람은 비난받고 도태되어야 한다. 여가는 생산자본으로 전환 가능한 문화자본, 사회자본을 축적하는 시간이지, 놀고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자본은 실패한 자본이며 시장에서 바로 퇴출될 수밖에 없듯이, 노동자 역시 자기 계발이라는 잉여와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제 노동자는 노동현장에서 자본가처럼 행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역설에 갇혀 산다.

p.84

물론 그 촛불들이 늘 성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저항은 실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늘 실패하고 패배한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촛불에 참여한 사람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배재된 주권자인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함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
p.222

 
자유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소유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자유는 누구의 것이며 어디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는가?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질문과 씨름을 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자유와 권리의 출발을 '나'나 배타적인 '우리'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와 우리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사상은 근본적으로 타자를 전제하고 배제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236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소한 인물들의 등장과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휘몰아친다.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일반 소시민들의 삶의 이야기는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고, 일반적이었지만 정확히 알지 못했던 에이즈와 여성의 외모 그리고 9.11 과 황우석박사의 이야기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을 갖는다. 그만큼 일반인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적은 책이지만 너무나 빠르게 휘몰아치는 사건과 사상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이 책의 저자의 말은 모두 다 옳다는 결론 외에는 어떠한 생각도 하기 쉽게 만들지 않는다. 즉, 누군가로부터의 비판 혹은 반박의 여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책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방향을 상상하거나 추측하는 순간 이미 책은 저기 멀리서 빨리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최근의 읽은 책들이 생각의 여지를 남겨두는 소설 혹은 문학작품이었기에 오랫만에 읽은 인문과학 서적이 요구하는 사고의 진행은 나에게 약간은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책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의 시작과 그로인한 노동자의 자본가돼기,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천하는 정부가 규정하는 시민과 시민이 아닌 다수, 소유의 자유를 벗어나 새로운 자유에 대한 개념정립의 필요성, 그리고 정부에 의하여 테러리스트로 규정되는 다른생각을 가지고 시위를 하는 국민을 이야기한다.
분명 자유는 자유라는 하나의 단어로 규정되어있지만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혁명(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6월항쟁.) 이전의 자유는 아니다. 더이상 자유의 의미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탈출을 말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선진국의 롤모델이 되어버린 현대에서의 자유란 어떠한 가치일지라도 소유되고 소유 할 수 있는 자유가 가능해진 사회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의 자유는 각각의 개인에서 발생한다.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그리고 개개인의 삶의 모습을 보장한다는 번지르르한 말로 시작하는 자유, 그것이 바로 신주유주의가 주장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자유의 의미로부터 벗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여러번 의미가 변화해 온 자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대에 사유하는 철학자의 이야기를 하며 자유의 밑바탕에 있는 책임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자유를 역설하고자 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타성을 통한 자유의 실현. 아직 레비나스의 생각에 대하여 직접 사유를 해본 적이 없어 길게 적을 수는 없지만 변화해온 자유의 의미와 새로 나아갈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든 책이다.

물론 자유외에도 사유, 참여, 인권, 존엄성등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정작 가장 와닿은 이야기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뭐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책을 직접 읽는것.ㅋㅋㅋㅋㅋㅋㅋㅋ어쨋든 쉽고 편하지는 않았지만 술술 읽히는 마치 게임을 하며 시간가는지 모르는 듯한 기분으로 읽은 책은 참 오랫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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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와 다름없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기대되는 특징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보통 이 유전자의 이기성은 개체의 행동에 있어서의 이기주의를 낳는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 볼 어떤 유전자는 특별한 상황에서 개체 수중에서 한정된 형태의 이타주의를 조장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마지막 문장의 '한정된'과 '특별한'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보편적인 사랑이라든지 종 전체의 번영이라든지 하는 것은 진화적으로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는 개념에 불과하다.
                                                                                            - 이기적 유전자, Richard Dawkins.


 
문득 기계가 되어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열나면 열나는데로 error창 한번 띄워주면 되고, 수리해 달라고 말좀 안들으면 되고,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으면 그냥 그자리에 퍼져버리면 되니깐 말이다.  

이러고 있으니까 문득 두번째 생각이 떠오른다. 어느새 과거가 된 2년짜리 군사학기 중에 깊은 산에 들어갔다. 얼마나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인지 수풀이 우거졌다는 단어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숲이었다. 그 숲속에서 만난 차도에서 굴러 떨어진 푸른 색 작은 트럭 하나. 자동차는 현시대의 총체이고, 동시에 과거의 유물이지만, 나무 풀과 함께 있는 그 장소에서 만큼은 자연의 일부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 규정해 좋은 사회적인 기계의 하나인 한편, 숲속의 있으나 없으나 한 수많은 나무의 하나이다. 기계처럼 움직이다가 그러다가 지치면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 혼자 멀찌감치 나무처럼, 풀처럼,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움의 하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기계의 숲속, 희망을 가진 생각하는 세포기계, 멀리서 보면 모두 같은 인간과 나무.  

적고보니까 책이랑은 별로 상관없는 내용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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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YOULS 2010.07.23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나의 '세포'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의 세포로 살아갈 것인가의 딜레마 아닐까여
    좋게말하면 조화 vs 개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몰개성 vs 무질서 뭐 대충 그런구도.. (약간 정치색이 나는 이유는 뭐죠 ㅋㅋ)

    인간이란 결국 종의 테두리에서 태어났기에 그 집단안에서 살아가야 하면서도,
    결국 어떤 발악을 해도 1인칭 시점이기에 자신의 정체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데
    결국 그 두 생각이란것도 '종의 존속을 위한 전략'이라는 같은 집합 안에서 묶인다는게
    책의 내용인데..
    결국 이타성, 이기성이란것에 도덕적 색채가 칠해져서 좀 거북해하는 사람도 있는거지만
    생존전략에 대한 하나의 각도일뿐인거죠.

    종교계나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꽤나 싫어할만한 책이기도 하고요...
    그들의 숭배하는 '이성'을, 그들이 혐오하는 '본능(생존, 번식)'으로 뭉개버리는 것도 모자라
    본능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좀 역겹기야 하겠죠.


나의 내심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를 끌어당겨 당신 곁에 매두는 일종의 뜨거운 열기에 싸여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난 내 비겁함에 굴복해서 당신이 날 껴안기를 기다리면서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의 정열은 시골뜨기의 음흉한 조심성을 아직도 잠재우지 못하고 있었다.

p.74

미친듯한 테레즈는 또다시 흉터에 키스하려했다. 카미유의 이빨이 쑥 들어갔던 그 피부 위에 입을 대면 거친 쾌감이 느껴졌다. 잠시 그녀는 그 상처 자리를 물어뜯어 넓은 살 조각을 떼어내 원래의 상처를 덮어씌울 더 깊은 상처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이빨자국을 보면 새파랗게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p.238

라깽부인은 죽은 후 편히 잠들기 위해서는 복수를 했다는 통렬한 기쁨이 있어야 했다. 증오심이 만족된 꿈, 연원히 꾸게 될 그 꿈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다.

p.316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에서 자기자신의 생각을 다시 발견하고 얼어붙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당황한 얼굴에서 은밀한 계획을 읽으면서 서로 가엾게 여기고 서로 무서워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왔고, 또 비겁함으로 인해 살아남게 되면 또다시 겪어야 할 심연 속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과거를 회상하자, 끝없고 거대한 휴식과 망각을 바랄 만큼 지쳐, 스스로에 대해 구역질을 느꼈다....... 그들은 벼락을 맞은 듯이 서로 포개져 쓰러지고 마침내는 죽음 속에서 하나의 위안을 찾았다.젊은 여인의 입은 남편의 목에 있는 흉터에 닿았다. 그것은 카미유가 이로 물어 뜯어 생긴 상처였다.......뻣뻣한 몸으로 말없이 앉아서 라캥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듯 발 밑의 두 시체에 무겁고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p.348


박찬욱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된 책이다. "떼레즈 라깽"안에는 박쥐 이상의 육체적 욕망과 피에 대한 갈망이 있다. 물론, 영화처럼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보는 사람을 하여금 압도하는 힘은 부족하지만 그 이상으로 목요일마다 찾아오는 주변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시어머니인 라깽부인에 대한 심리묘사가 주는 긴장감은 발가벗은 인간을 보는 듯한 혐오감을 제공한다. 동시에 로랑, 떼레즈, 라깽부인, 목요일의 이웃들의 이기심과 자신들 내면에서 유발되는 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한 설명은 말 그대로 소름끼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군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오히려 육욕과 피에대한 갈망을 채우기 위하여 사건을 저지르고 고통받는 떼레즈와 로랑에 대한 연민이 생기는 것이 어찌보면 라깽부인의 비정상적이며 떼레즈와 로랑과 같은 수준의 혹은 그 이상의 피에 대한 갈망을 내가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피에대한 이미지, 이빨자국, 두 남녀의 육체적 갈망, 라깽부인의 복수심.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화"박쥐"에서 라깽부인의 복수심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어느정도는 떼레즈와 로랑의 내면적인 고통이 책에 비하여 약하게 전달되어 두 종류의 작품을 끝까지 보고서 내가 느낄 수 있던 점이 크게 같지 않았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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